[장영주 칼럼](35)재미있는 설화 - 돌하르방 선녀탕⑥
[장영주 칼럼](35)재미있는 설화 - 돌하르방 선녀탕⑥
  • 뉴스N제주
  • 승인 2021.09.05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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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교육학박사
명예문학박사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한국사진작가협회회원

● 고근산 앞 범섬

고근산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
고근산 길 중간에서 바라본 범섬)
고근산 길 중간에서 바라본 범섬)
고근산 정상 부근에서 바라본 범섬
고근산 정상 부근에서 바라본 범섬

고근산 앞 범섬은 고려 말 ‘목호의 난’ 때 최영 장군의 마지막 승전지로 고려 공민왕 23년(1374) 최영 장군이 이끄는 토벌군은 명월포(한림 옹포리)를 통해 상륙한 후 금악, 새별오름 전투에서 목호들을 격퇴했다.

새별오름 전투에서 패한 난적, 목호는 오음벌판(지금의 강정마을)에 배수진을 쳤다. 이 싸움에서도 대패하면서 결국 서귀포 법환마을 앞 범섬에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범섬에 앉았다가 설문대 공주선녀에게 혼이 난 설문대하르방은 꽁무니를 빼 대정현성 남문 앞 물에 되돌아온 게야.

“기다리게 해놓고 오지 않는 사람아….”

고근산을 향해 중얼거렸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기다리게 해놓고 오지 않는 사람아/이 시간은 너를 위하여 기다리는 것인데/기다리게 해놓고 오지 않는 사람아/나는 기다림에 지쳐서 이제 그만 가노라

이 노래는 방주연이 불렀는데 작사자는 김건호이다.

잠깐, 야화 하나, 작곡자 ‘김건호’는 필자의 가까운 문화 동호인 최영@ 출판사 사장과 아주 가근한 사이다. 김건호가 생존했던 오래전 최 사장과 필자는 김건호를 만나 약주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가 말 한마디 마디가 모두 작곡이 되는 그런 천재였다.

그의 몸은 그의 몸이 아니었다. 수술을 수십 번 하며 몸 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신체 일부분은 떼어다 붙인 그런 몸이라나? 숨 가쁘게 말을 해 대는 데도 애처롭게 보이지 않는 건 그의 낙천성이 너무 평화롭게 여겨지는 탓이리라.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타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래방에 가면 곧잘 그의 노래를 부르는 습관이 생겼다.

‘방주연’은 제1회 한라문화제 10대 가수상을 받기도 했다.

​약속했던 시간을 허공에 두고/만나지도 못한 채 엇갈린 순간 속에/잃어버린 꿈을 잃어버린 꿈을/잠재우고 가노라

​기다리게 해놓고 오지 않는 사람아/나는 기다림에 지쳐서 이제 그만 가노라/이제 그만 가노라/이제 그만 가노라

​만감이 교차하는 듯 설문대하르방은 허공을 바라봤어.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가출하는 게 아니었는데….’

설문대하르방은 후회하고 있는 거야.

설문대하르방은 눈을 감았어.

‘어? 설문대 공주선녀네.’

서귀진 하늘에 설문대 공주선녀의 얼굴이 구름 되어 나타나는 거야.

설문대 공주선녀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어.

그렇게 곱고 고왔던 얼굴이 인젠 굵은 주름으로 온통 얼굴을 뒤덮고 있는 게야.

‘쯧쯧, 세월의 흐름을 누가 감히 막을 고?’

설문대하르방은 중얼거렸지.

가는 세월 그 누구가/잡을 수가 있나요/흘러가는 시냇물을/막을 수가 있나요/아가들이 자라나서/어른이 되듯이/슬픔과 행복 속에/우리도 변했구료

하지만/이것만은/변할 수 없어요/새들이 저 하늘을/날아서 가듯이/달이 가고/해가 가고/산천초목 다 바뀌어도/이내 몸이 흙이 돼도/내 마음은 영원하리/이내 몸이 흙이 돼도/내 마음은 영원하리

남문 앞 물 쉼터 정자에서 바라본 전경
남문 앞 물 쉼터 정자에서 바라본 전경
남문 앞 옆 쉼터 정자
남문 앞 옆 쉼터 정자

오랜 세월이 흘렀어.

설문대하르방은 대정현성 남문 앞 물에 우드 켜니 선 채로 돌이 되고 말았지.

남문 앞 물을 지키는 돌하르방이 된 게지.

돌하르방이 된 설문대하르방은 족감석 대신 벙거지를 쓰고 방긋 웃었지.

비록 발길질을 당했지만 그게 미워서겠어?

설문대 공주선녀의 연민의 정이 넘쳐 그렇게 한 거지.

사실 설문대하르방에 대한 미련을 설문대 공주선녀도 언제나 간직하고 있었던 게야.

어느 날 대정골 사람들이 남문 앞 물을 바라보며 혼자 서 있는 돌하르방을 본 거야.

“여기 안 보이던 돌하르방이 있네.”

“그러게, 어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야.”

사람들이 웅성거렸지.

그 후 남문 앞 돌하르방은 옮겨 졌고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정골 사람들은 남문 앞 길 건너 어느 곳에 한 쌍의 돌하르방을 세워 고독을 달래 주었어.

주) 대정현성 남문 앞에 서 있던 돌하르방은 산업화(길 넓히는 공사)로 4기가 뿔뿔이 흩어졌다가 현재 한곳에 모여 있음, 설문대하르방이라 리얼하게 표현된 돌하르방은 2-34호로 추측, 근거로 예전 위치가 보성리 1246 신평간 도로변, 지정 1971. 08. 26. 1기라는 분포도)로 남문 앞 돌하르방은 옮기게 되었다.

“돌하르방 벗을 만들어 드리자.”

사람들은 돌하르방과 비슷한 돌하르방 두 개(기)를 만들어 어느 집 앞에 세워 두었어.

주) 돌하르방은 손을 얹는 위치에 따라 문관, 무관으로 나뉜다. 왼손이 올라간 돌하르방은 문관(책을 왼손에 들고 읽기에) 오른손이 올라간 돌하르방은 무관(오른손으로 칼 손잡이를 잡기에) 이란 속설을 필자가 임의로 구분하는 형태를 정해 보았다.

남문 앞 물 앞 돌하르방 한 쌍
남문 앞 물 앞 돌하르방 한 쌍
남문 앞 물 전체 전경
남문 앞 물 전체 전경
남문 앞 물 앞에 소치 허련 기념비가 있다
남문 앞 물 앞에 소치 허련 기념비가 있다

세월이 흘러 설문대하르방이 돌하르방이 되어 서 있던 자리엔 인성리를 나타내는 표지석이 서 있고 그 옆자리에 소치 선생의 기념비를 대정골 사람들이 세웠지.

○ 소치 허련

조선 시대 왕 헌종이 소치가 추사의 유배지에서 추사 뒷바라지하고 있을 때 그(소치)(1808~1893)를 낙선재로 불렀다. 수치는 관복을 입고 입궁했다. 몰락한 양반의 후손인 무명화가가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한다.

소치는 추사가 제주로 유배 가기 전 서울 집 사랑채에 기숙하며 시서화를 배우던 마지막 제자로 추사가 유배되고 몇 달 뒤 제주로 내려간다. 스승의 유배 뒷바라지를 위해 무려 세 번이나 거룻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고 자서전 소치 실록에 나온다. 갈 때마다 유배지에서 스승과 함께하며 몇 개월씩 머물렀다 한다.

야화 한마당

헌종, 그대가 세 번 제주에 들어갈 때 거친 풍랑 속으로 왕래하는 것이 어렵지 않더냐?

허련, 하늘과 맞닿은 큰바다에 거룻배를 이용해 왕래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운명에 맡겼습니다.

헌종, 현지에 당도해 스승을 만나니 소회가 어떠하더냐?

허련, 위리안치 중인 스승을 찾아가 먼저 절을 올리고 나니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사옵니다.

헌종은 제주 목사의 장계를 통해 보고를 받은 듯 소치의 제주 행적과 추사의 유배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추사는 8년 3개월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상경했다가 안동 김 씨가 권력을 잡자 1852년 7월 다시 최북단 북청으로 유배를 떠난다.

 

 

 

주) 소치 허련이 제주 유배지에서 그린 스승 추사의 초상화/삼성미술관 소재, 제주 유배지 김정희 추사관으로 옮길 것을 청와대에 청원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 대정현성 둘러보기

남문지성
남문지성 앞 돌하르방 4기
41호
42호
43호
44호

동문성지 우측

 서문지 돌하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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