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건공장군 김성조 영정 그리기
[특별기고]건공장군 김성조 영정 그리기
  • 뉴스N제주
  • 승인 2021.08.3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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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택 수필가
김성조 초상
건공장군 초상

영정은 특정 인물의 자태를 그린 그림으로, 영(影), 진(眞), 진영(眞影), 상(像, 相), 화상(畵像), 초상화, 인물화라고도 한다.

초상화(인물화)는 흔히 후손에게 교훈의 의미를 주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의 목적으로 제작된다. 생시이건 고인(故人)이건 얼굴을 묘사하여 그 자체로 화가의 시대적 예술작품이면서 화면속의 대상자를 기억하는 기념물이 된다. 역사의 인물은 사진보다는 유화로 그려 보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값있게 친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 또는 국회의장의 모습을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둔다. 조선시대에는 영정각, 현대에는 청와대, 국회에 나란히 걸려있다. 초상화에는 특정 인물을 핵심적인 주제로 각 시대 인물화의 특징을 집약하여 표현된다고 볼 수 있다.

초상화의 종류로는 어진(御眞)·공신상(功臣像)·기로도상(耆老圖像)·사대부상·여인상(女人像)·승상(僧像)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건공장군 김성조상은 공신상에 해당된다.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들에게 내린 공신호(功臣號)나 포상(褒賞)을 기념하는 것이다. 해당 공신과 그 자손들에게 치하와 함께 포상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김성조 초상
김성조 초상

영정은 사묘(祠廟)·사당(祠堂)·서원(書院)·진전(眞殿)·진영각(眞影閣)등 특정 장소에 봉안하고 주로 제사 때 사용된다. 고승의 초상화(僧像)은 조사(祖師) 신앙의 예배 대상으로서 선종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일단 영정이 일정소에 봉안되면 신주, 지방(紙榜), 혼백, 묘비와 마찬가지로 망자의 영혼을 의탁하는 일종의 상징물이 된다. 나아가 관광객들이나 후손들이 일상으로 경배하고 제사를 올리게 되므로 영정에 통신(通神)하게 되어 기도인의 영험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영정은 일반 사진의 가치를 넘어 그림속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할 수 있는 메시지이자 숭배와 기원(祈願)의 대상이 된다. 장차 교과서나 여러 책자에 실리거나 동상으로 제작될 때에 그 기준이 된다, 물론 화폐 도안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그리는 방법으로는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린 도사(圖寫), 생존 시 그린 진영이 없어 얼굴을 아는 이들의 기억에 의존해 그린 추사(追寫), 기존 진영을 바탕으로 제작하는 모사(模寫)로 나뉜다.

건공장군 초상
건공장군 초상

예를 들면, 최근(2019) 해인사 대작광전에 봉안된 경순대왕 어진(御眞)은 나주김씨 가문에서 동양화가 백미자 님께 의뢰하여 제작한 모사(模寫)이다. 원화가 낡아 자취가 희미하고 원래 영정을 모셨던 해인사로 환귀본처(還歸本處)하자는 염원들이 모여 제작된 것이다.

단종의 어진은 생존 시 모습을 그린 도사(圖寫) 작품이 없기 때문에 추사(追寫)방식으로 제작됐다. 전통적인 장황 기법의 족자 형태다. 단종의 용안은 조선왕조실록과 행장 등 사료와 전주 이씨 종중의 골상적 특징이 고려됐다고 한다. 여기다 국보 317호 태조 어진 경기전본과 세조 어진 초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을 검토해 공통된 특징을 추출했다.

논개 영정은 논개가 나고 자란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을 중심으로 신안 주씨(新安 朱氏) 문중 여성 150여 명의 얼굴을 분석해 모델을 찾아냈다고 한다. 또 '넓고 네모반듯한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을 표현하는 조선 시대 미용법을 따르고 복식(服飾)은 고전복식전문연구소에 의뢰해 과학적인 검증을 거친 영정이 되었다.

건공장군 김성조(1527~1575)의 청년기 모습에 대한 기록이나 진영은 물론 찾을 수 없다. 을묘왜란 당시를 기준 잡으면 466년 전 조선 중엽 용감무쌍한 28세의 젊은 인물이다. 수염을 기르기 시작할 때이다.

김성조 장군의 실제 얼굴이 수백 년 후 배우 얼굴보다는 후손들의 얼굴을 닮았을 확률이 높긴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유전 정보는 DNA의 유전자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외향적 특성 가령, 머리카락, 피부색, 대머리, 눈빛, 입술, 키, 체질, 성격 따위는 후손과 인척간 공통점이 있다. 물론 친족 간에 전혀 닮지 않은 경우도 많다. 결국 김성조 장군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상상의 영역인 것이다.

김성조 초상
김성조 초상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상태에서 일종의 상상화가 씨족 공인 초상으로 제작되는 것이기에 물론 논란이 없을 수 없다. 상상에 기댈 수밖에 없는 초상화는 천차만별로 나올 수 있고 누구에게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표준영정이 필요하다.

국가표준영정 제도(1973)는 마땅히 ‘민족적으로 추앙받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므로 영정이 조잡하고 무분별하게 창작되거나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김성조 장군은 정사(正史; 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공신이고, 영정이 난립되기 전에 해당 가문에서 봉안하고 받드는 것이므로 논란의 여지나 간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도 장군의 공훈과 표준 영정으로 인정되어 보훈 헌충시설로 지정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전문화가에게 연락해보니 역시 기준될 인물의 화상(그림이나 사진)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성조 장군의 경우도 장남 중심의 직계 후손과 계파별 대표 인물 등 30명의 사진을 확보하고 최대 공약수로 그림을 요약해 보았다(그림 참고). 영정봉안의 취지는 후진(後進)들이 의지할 데를 구하여 그 진영을 모시자는 것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처럼 터럭 한 올도 다르지 않게 그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지마는 생시에 그렸더라도 가능하지 않다. 사실 꼭 닮을 필요는 없었고 70% 닮으면 최고로 쳤다(七分相似).

그림은 나의 전공이 아니거니와 초중학교 미술시간 외에는 그림 공부를 해본 적이 없으나 취미는 있었다.

나는 한때 세종미술관(갤러리)을 연 적이 있어 미술가들과 인연이 많긴 하지만 그림을 전업하시는 분들 앞에서 화상을 그리고 찬을 한문으로 붙이는 일은 실로 공자님 앞에서 문투를 쓰는 격이었다. 먹 붓 한 선으로 대상 인물이나 평면사진을 크로키(croquis)하여 담채로 배채(背彩)하거나 덧칠하기도 한다. 전투복인지 의식복인지 복식은 시대적 고증을 거쳐야 하므로 내가 간여할 사항도 아니고, 본격 인물화가 아니므로 송구하지만 미완인 채로 작품을 내는 셈이다.

영정(影幀)이나 신주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을 사당이라고 한다. 그림이 완성되면 현재 건립 추진 중인 사당에 봉안할 예정이다. 김성조 장군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찬기를 덧붙이는데, 채택되기를 기원한다. 제목은 “建功將軍有誰知(제 건공장군유수지/ 건공장군을 누가 알까?)”에 미운(微韻)이다.

김성조 초상
김성조 초상

氣鍾漢岳智明幾 기종한악지명기 한라산 정기 받아 지혜는 기미를 밝혔고,
骨榦南州壯甚輝 골간남주장심휘 기골은 제주에서 장대하다 이름났네/
將得驄馯通互神 장득총간통호신 장군이 사나운 청총을 얻어 서로 신기가 통하니
强如虎豹術凡非 강여호표술범비 용맹하기 호랑이 같고 병술은 비범하네/
虛無所試懷韜略 허무소시회도략 헛되이 육도삼략을 품은들 펼 데가 없더니
宿寇尋來乙卯肵 숙구심래을묘기 왜구들이 을묘년 죽을 자리로 찾아들었네/
拔劍奔馳倭敗退 발검분치왜패퇴 말 타고 칼을 빼 내달으니 적들은 패퇴하고
忠功勇躍拖祥禨 충공용약타상기 용약 충성스러운 공로로 상서롭게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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