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속담에 깃든 건공장군 이야기
[특별기고]속담에 깃든 건공장군 이야기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1.08.28 08: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정택 수필가
제주문인협회 회원인 홍창국, 김정택, 현글 작가 세 명이 한국에이즈퇴치연맹제주특별자치도지회(회장 김순택)와 뉴스N제주(대표 현달환)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한 ‘2020 제1회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심사를 진행했다
김정택 수필가

속담(俗談 諺語 俚語 俚諺 俗諺)에도 역사가 숨어있다.

선인들의 언술형태(토속어 고어)에는 삶의 철학과 지혜가 응축된 생활훈(처세훈)이 깃들어 있기 까닭이다. 그래서 속담을 민중의 시, 언중(言衆)의 시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옛 분들이 일상생활에서 직접 체험한 삶의 철학을 간명하게 표현한 언어가 속담이라 할 수 있다. 속담은 대개 간결한 형태로, 의미나 교훈성이 있고, 감칠맛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건공장군 김성조(金成祖 1527~1575)와 관련하여 우리 가문에 전해오는 속담을 풀어보기로 한다.

▶ ᄒᆞ나를 알민 열을 안다.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미루어 안다.」는 뜻으로, 배우는 이의 총명(聰明)함을 이르는 말로 문일지십(聞一知十)과 같다. 김성조가 어릴 때 그의 영민함을 서당 훈장이 《천자문》 《명심보감》, 《격몽요결》 등을 가르치면서 인정한 바였다. 서당 수습기간을 벗어나자 《십팔사략》이나 《자치통감》 같은 역사책을 읽고, 《소학》을 통해 유학의 기본을 공부한 후에 본격적으로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향교출입은 늦어져 20대 후 장인 김양필이 인도해서였다.

비슷한 속담인 「ᄒᆞ날 보민 열을 알주.」는 상대방의 행동거지 가운데 하나를 보면 다른 행동거지나 처사도 미루어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오현고 상판 위에 제주시가 <을묘왜변 전적지> 표석을 세웠는데, 그 위치의 잘못을 지적해도 고치지 못하는 행태를 놓고 ‘하나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다.’며 시정(市政)의 다른 잘못까지도 미루어 비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병정놀이 ᄒᆞ단 아으 크민 건공장군 뒌다.

「뒐 낭 ᄃᆞᆯ레입부터 알아진다.」(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뒐 쳇 종ᄌᆞ 귀작박으로 알아본다.」(될 첫 종자는 귀작박으로 알아본다)와 같은 부류의 속담이다. ‘병정놀이 하던 아이가 자라면 건공장군 같은 무장이 된다.’는 뜻이다.

‘ᄃᆞᆯ레입’은 쌍으로 된 떡잎을 말하고, ‘귀작박’은 좁씨를 파종하고 나서 4,5일 후 쪽박처럼 트인 외잎 첫 싹을 말한다. 그러므로 어린 싹이 튼실하게 생겨야 장차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병정놀이는 아이들끼리 놀다보니까 생기는 놀이의 하나이다. 아이들은 자기대로 놀잇감을 만들면서 논다고 한다. 아이들의 무술과 지휘 모습도 누가 가르쳐서 나타난 놀이가 아니고 병정의 흉내를 내는데 불과하지만 그 야무치게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 어릴 때부터 장래성이 있는 징후를 감지하게 된다는 비유이다.

▶ 둥그린 아은 쓸 메 나곡, 모시는 아은 어중기 뒌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귀천을 체감할 수 있도록 키워야 장차 성인이 되어도 쓸모 있는 인재가 된다. 비슷한 말로 「뒐 첫 종ᄌᆞ 돌 막아 놓나」(됨직한 종자를 돌로 둘러싸면 되나)는 자식 귀한 줄만 알고 감싸고 고이 키우다 보면 오히려 해치게 되어 성장한 후에 세상물정을 모르고 미련한 바보가 되고 만다.

‘둥그린 ᄃᆞᆨ세긴 빙애기 뒈곡, 둥그린 사름은 쓸 메 난다.’(뒹굴린 달걀은 병아리 되고, 뒹굴린 사람은 쓸모가 생긴다.)와 비슷한 내용이다. 김성조는 엄장이마을(구엄리) ᄆᆞᆯ테우리(목동) 출신이었는데, 가계는 1403년경 입도하여 은신한 고려 유신인 김인충(강화진좌령낭장)의 5대손이다. 선조 이래 신분을 감추고 농사와 목축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귀천을 체감하면서 살았지만 그러한 경험들이 자신을 성공시킨 기반이었다.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가졌고 좋은 인연을 만났고 또 좋은 가르침을 받았다 하더라도 경험과 적공과 능력 곧 자기의 공력이 들지 않고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가 없다. 김성조는 ᄆᆞᆯ테우리 출신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 미릇 ᄎᆞᆯ염시민 쓸 디가 있나

‘큰일을 미리 대비하다보면 쓸 곳이 있다“는 말이다. 《시경(詩經)》에 “스스로를 미리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하라(懲毖).”는 말이 나온다. 김성조는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과 불신, 무사안일로 일관했던 상당수 관료와 군인들 모습, 방비준비 소홀로 유발된 참담한 결과를 듣고 보면서 자랐다. 향토수호의 일차 책임은 지역의 관민이며, 수호에 실패한다면 다음 세대가 회복할 책임을 지게 된다고 늘 명심하였다. 그가 늘 병술을 익히고 병법을 공부했던 이유였다.

때마침 남치근(南致勤) 목사가 왜구의 잦은 침략에 대비하여 군역의무를 강화하였다. 김성조는 양반출신이라고 면제 받을 수 있었지만 무과시험을 앞두고 경험을 쌓겠다며 군역에 지원하였다. 그를 알아본 목사는 교관을 시켰더니 썩 잘 해내는 것이었다. 명종10년(1555)이 되자 남치근의 후임 새 목사로 김수문이 1555년 1월 발령 받아 3월에야 착임했다.

제주목사부임 직후인 5월에 조정에 보내는 보고문 관계로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하였다고 제주목사인(濟州牧使印)을 판관인(判官印)으로 강등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군역에서 지인(知印)으로 발탁하였다.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조는 고립무원에 빠진 김수문 목사에게 돌파계획을 제시하였고 치마돌격대로 자원하여 전승을 거두었다.

▶ 도략(韜略)을 알민 쓸디 써사쥬.

무슨 일이 다닥쳐야 허둥대어서는 안 된다. 미리 재난에 대비해야 값있게 쓰이게 된다. 「사농 들어사 개 ᄀᆞ리친다.」는 기회를 놓쳤다는 탄식이다. 김성조는 어릴 때부터 활쏘기 칼쓰기 말달리기를 연마하였고 문학과 병법을 공부하였다. 육도삼략 손오병법 같은 병법은 섬 안에 가르칠만한 스승이 없어 독학으로 공부했다. 왜구의 습격이 잦은 때라 언젠가 쓰일 때에 대비했고 쓰일 때를 기다렸다. 「도략을 알면 쓸디 써사쥬.」는 김성조를 두고 나온 속언(俗諺)이었다. 도략(韜略)은 중국의 전통 병서 『육도삼략(六韜三略)』의 준말이다.

▶ 사둔ᄒᆞᆯ 땐 근본을 봐사 ᄒᆞᆫ다

사둔 삼을 때는 근본을 봐야 한다. 김양필 교수관은 학문이 높고 다른 가문의 가승을 잘 아는 이였다. 김성조를 사위 삼을 때를 본 받아 김 교수관처럼 가문의 바탕을 혼사의 요건으로 중시하라는 말이다.

▶ 사위 잘 ᄒᆞ민 집안 망ᄒᆞᆫ다

‘사위를 잘 두면 집안 망한다.’는 말은 김성조 장군을 헐뜯는 말이다. 장인 경주김씨 양필 교수관은 딸 외에 후손이나 양자가 없었고 사위는 시대적으로 사손(嗣孫) 자격이 없어 외로운 것은 사실이었다. 김양필 교수관의 후계가 이어지지 못한 것은 그 자신의 문제이었고 불행이었지 사위 탓이라고는 할 수 없다.

▶ 장수 나거니 용매 나거니.

‘장쉬 나자 용매 난다.’ 또는 ‘장군 나니 용마 났네(將軍出 龍馬出)’와 같은 뜻이다. 김성조가 장가들어서 김양필 교수댁에 있을 동안 겨우내 움추려 지내던 웅마가 삼사월이 되자 힘이 솟아 야성을 발동하여 활기 찬 울음을 터뜨리며 앞발로 땅을 찧고 콧소리를 내는 등 억샌 기질을 드러냈다. 기세가 등등하여 거칠 것이 없어 아무도 어거하질 못하였다. 김성조가 올라타 성읍까지 왕복 400리를 달려오는 동안 온전히 순화(馴化)시켰으므로 동네 사람들이 김성조와 말(馬)을 칭송하였다.

「ᄆᆞ쉬도 부려봐사 안다.」고 김성조는 이 말과 호흡이 딱 맞았다. 실제 김성조 28살에 을미왜변(1955)이 일어나자 이 말을 타고 치마(馳馬) 돌격대를 자원하여 왜군을 평정, 건공장군을 수직하자 온 섬 안에 소문나게 되었다.

▶ 성동격서(聲東擊西)나 성서격동(聲西擊東)이나.

성동격서는 "동쪽에서 소릴 지르고 서쪽을 친다" 는 뜻으로, 동쪽을 쳐들어가는듯하면서 상대를 교란시켜서 실제론 서쪽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병법에는 성동격서이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반대로 "서쪽에서 소릴 지르고 동쪽을 친다"로 할 수가 있다는 뜻이다.

을묘왜란의 전적지는 남수각 동쪽 구릉이었으므로 서쪽에서 소리를 내고 동쪽에서 적을 쳐야하는 상황이었다. 적의 서쪽을 쳐들어가는 듯 적을 교란시켜서 실제로는 왜구가 진주한 동쪽을 공격함을 이르는 말이다. 김성조는 성서격동(聲西擊東)의 전법을 썼다. 즉 효용군 70명이 서쪽에서 공격하는 동안 동문성을 돌아 잠입한 4인의 치마대(馳馬隊)는 동쪽에서 갑자기 왜군 진지를 뚫고 들어가 쳐부술 수 있었다. 이 일화가 속담화하여 전해지고 있다.

▶ 죽젠ᄒᆞ민 살곡 살젠ᄒᆞ민 죽나. 죽으리로 헴시민 살 일이 셍긴다

제주 을묘왜변(1555)의 4인 돌격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자원한 치마(馳馬, 기마대) 돌격이었다. 남수각 동쪽 구릉에서 효용군 70명도 가담했으나 효용군은 고함지르고 화살공격을 하는 등 4인의 돌격을 엄호하는 것이 목표였다. 치마 돌격대는 향토예비군 수준에서 자원했지만 왜구 1천명을 격파한다는 결사의 각오가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다. 살려고 뒷전에 섰으면 죽었을 것이었지만, 죽으려는 비장한 용기로 내달았으니 살았고, 왜구를 격파할 수가 있었다.

을묘왜란의 영웅 건공장군 김성조에 대해 모르는 분이 많다. 그러나 우리 생활 속에 녹아있는 속담 가운데 김성조 장군의 이야기를 적지 아니 찾아볼 수가 있다. 우리 일상에서 김성조 장군은 알게 모르게 도민들을 계도하고 있는 것이다.

*김성조 장군은 제주도 출신의 뛰어난 용장으로 을묘⸳병진왜변 때 왜구를 격퇴하여 도탄에 빠진 창생을 구출함으로써 역사에 기록되는 위대한 공훈을 세우신 분이다. 제주도 출신의 인물열전을 더듬어 보면 문과에 급제한 이는 많으나 직접 무기를 들고 적중으로 돌격하여 향토를 지킨 인물은 극히 드물다.[편집자 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