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택 칼럼](2)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
[김정택 칼럼](2)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
  • 뉴스N제주
  • 승인 2021.08.27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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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
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수필가

지난 19일 본지에 실린 김정택 김정택(순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시인)이 본지에 특별기고로 올린 '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라는 내용을 싣고 본사는 '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에 대한 자료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추진위원장 이름으로 칼럼을 게재하기로 했다.

내용은 거의 자료집 그대로 싣는데 조금 부가적인 내용을 첨가할 예정이다.

한편, 추진위는 '을묘왜변의 영웅들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영웅들을 찾고 있다.

남수곽 동쪽 구릉에서 을묘왜변(1555)의 승전을 이끌었던  4인의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용사와,  왜장을 사살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

이 분들을 아시거나 조상으로 두신 종친회에서는 제보 바란다며 함께 현양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제보 HP 010-6608-6925 ,Fax 064-712-3064 ,stkiimsj@hanmail.net)

이와 같이 지금 우리 주위에는 과거 제주를 살린 위인, 혹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영웅들을 찾지 못하기도 하지만 만약 찾더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이 그냥 묻히고 마는 사례가 왕왕 있다.  '건공장군 김성조'의 비만해도 전쟁터와 전혀 관계없는 다리 위에 세워놓아 관심은 커녕 오히려 퇴색되고 있다고 추진위원회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좀 더 우리 제주에 위대한 인물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 후손이라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행정에서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연재한다. 많은 응원과 관심바랍니다.[편집자 주]

제주문인협회 회원인 홍창국, 김정택, 현글 작가 세 명이 한국에이즈퇴치연맹제주특별자치도지회(회장 김순택)와 뉴스N제주(대표 현달환)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한 ‘2020 제1회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심사를 진행했다
제주문인협회 회원인 홍창국, 김정택, 현글 작가 세 명이 한국에이즈퇴치연맹제주특별자치도지회(회장 김순택)와 뉴스N제주(대표 현달환)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한 ‘2020 제1회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심사를 진행했다

◆비문

「증 가의대부도총부부총관 행 건공장군김공성조 지묘」 비문(1933)

<비명 전면>

贈嘉義都摠府副摠管行建功將軍羅州金公成祖之墓

<음기 뒷면>

羅州之金 入海而族大者 自將軍公之築底也〭 公諱成祖〭 其先新羅敬順王孫雲發始封君焉〭 明永樂間 有郎將諱仁忠遂爲濟人 司直諱麗水 贈參判智孫 校尉允亨考 以上三世〭 妣濟州夫氏父奉事協〭 以嘉靖丁亥生 幼而岐嶷 智勇過人 善騎射〭 明宗丙辰 海寇伐我而牧使金秀文擧公擊退之大破于南郭〭 朝庭授以建功將軍之職〭 並見州乘及忠勳錄〭 萬曆乙亥卒〭 葬於加德蓮花池上丙坐〭〭 聚慶州金氏敎授良弼女〭 擧三子 男用瑚節制使用璉校尉 女適萬戶玄奉儀〭 孫男衛南僉正 秀南奉事 斗南珍南 曰裔孫 文科典籍衡重 察訪英集 通判英業 泊成均生員性昊 致鏞甲于南州士族〭〭 玆豈果報之未艾哉〭〭 後孫仁奎永權君將爲墓前 顯刻而謁文〭〭 膺鎬觀今夷狄橫行 槪智略之已古 不辭泚筆〭〭 光武後癸酉陽復月

<음기 측면>

三皇廟侍正 李膺鎬 謹撰

幼學 許鉀 謹書

十三世孫炳炫 十四世嗣孫 文廟直員 基銖 謹竪

<해의>

증 가의도총부부총관 행 건공장군⁶⁾ 나주 김공성조 지묘

나주김씨가 바다를 건너와 대족이 된 것은 건공장군이 쌓아주신 기반부터였다. 공의 휘는 성조요 그 선대는 신라 경순대왕 손 운발이 나주군으로 봉해지자 시작되었다.

명 영락년간((明 成祖 永樂帝의 재위년간 1360.5.2.~ 1424. 8.12)에 낭장 인충공이 제주도 사람이 되었고, 사직 김려수, 증참판 김지손, 교위 김윤형이 그의 3세(증조-조-부)이다. 비는 제주부씨 봉사 협이다. 가정 정해년(1527)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지덕이 뛰어나고 슬기와 용기가 남달랐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명종 병진년⁷⁾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목사 김수문이 공을 천거하여 남수곽에서 크게 무찔렀다. 조정에서 건공장군 직을 내렸고 제주역사서와 충훈록에 실려 있다. 만력 을해년(선조 8년,1575)에 돌아가시어 더럭 연화못 위 병좌에 모셨다. 부인은 경주김씨 양필(良弼) 교수의 여이다〭 3남매를 두셨으니 아들 용호(用瑚)절제사, 용련(用璉)교위와 딸은 만호현봉의(玄奉儀)에 시집갔다〭 손은 위남(衛南)첨정, 수남(秀南)봉사 두남(斗南) 진남(珍南)이다.

대수가 먼 후손으로는 문과전적형중(衡重) 찰방영집(英集) 통판영업(英業) 성균생원 성호(性昊)에 이르렀고 치용(致鏞)은 제주 사족의 으뜸이니 어찌 과보가 끊겼다 하리오. 후손 인규(仁奎)와 영권(永權)군이 글을 새기어 묘 앞에 세우고자 청하므로 응호(膺鎬)는 오늘날 왜구가 횡행함을 바라보며 옛날의 지략을 개탄하니 맑은 붓을 사양할 수 없구나〭〭 광무후 계유 양복월(1933. 음10월) 삼황묘 시정 이응호가 삼가 찬하고 유학 허갑(許鉀)이 삼가 글을 썼고, 13세손 병현(炳炫)과 14세 사손 문묘직원 기수(基銖)가 삼가 세운다.

6) 김성조의 수훈 건공장군은 왜변이 끝난 후인 1556년 전공에 의한 품계 포상이었으므로 증(贈) 건공장군에 따른 직책인 가의대부(嘉義大夫) 도총부부총관을 행(行)으로 함이 좋겠으나, 실제 상경하여 취임하지 않았으므로 품계와 직책은 증직일 수밖에 없었다. 가의대부는 종2품 문관의 품계이며, 도총부(都摠府)는 오위(五衛)의 군무(軍務)를 맡아보던 중앙의 최고 군사기관, 부총관(副摠管)은 오위도총부에 속한 종2품 벼슬이다.

7) 이 행장에는 병진왜변(1556)만 기술되었고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을묘왜변(명종10년 1555.6)은 누락되었다. 병진왜변(명종 11년)에는 적선 7척을 불태우고 왜구 215명을 죽였다. 이때에는 김성조의 아우 김성지(金成祉)의 공이 커 ‘어모장군’을 증직 받았다.

건공장군의 배위묘; 증 가의건공장군 김성조 지배 정부인경주김씨 지묘

<비명 전면>

贈嘉義建功將軍金成祖之配貞夫人慶州金氏之墓

<음기 뒷면>

夫人金氏 籍慶州系出於益和君仁贊 諡忠愍 錄我 開國元勳 若其入海之祖都監僉龍 考諱良弼生員官敎授贊建明倫堂而風蹟見冲菴集 嘉靖丙戌生 適羅州金公建功將軍 諱成祖以其平賊功 授之從二品 詳見耽羅誌及忠勳錄 金氏因致封焉 宣祖乙巳卒 育三子 男用瑚節制使 用璉校尉 女婿萬戶玄奉儀 孫男五 衛南僉正 慶南 秀南奉事 斗南 珍南 曰汝硈訓導 汝砥汝鏡汝鑑汝鈵汝錡汝鏑曾孫也 自後 雲仍益昌而 文科顯名者 典籍衡重 禮郞英集 掌令英業疏建啓聖祠 英樂同科第 萬兼賓興僉樞 性昊 致鏞俱中司馬 夫慶德之基也 念公之內祚胤 外定難而 世稱一家法祖 何莫非賢淑輔佐之力歟 比來 玟洙仁奎永權君 將有事 于阡表而 使膺鎬 告野人以毋樵牧敬之哉 墓在州西老衡里高舍峴坐巳原

<음기 측면>

光武後 癸酉陽複月 三皇廟侍正李膺鎬 謹撰 幼學 許鉀 謹書 十三世孫 秉炫 十四世 嗣孫 文廟直員 基銖 謹竪

<해의>

부인 김씨는 이 나라 개국원훈인 충민공익화군 김인찬에서 입도조 도감 김첨룡을 따라 경주김씨에 적을 두니 부친의 휘는 良弼생원으로 교수로 있으면서 명륜당을 찬건(贊建)하여 그 인품과 자취가 충암집에 나타난다. 가정(明 嘉靖) 병술(1526) 생이며, 부군 나주김공 건공장군 휘 成祖는 외적을 평정한 공으로 종이품 벼슬로 봉해졌음이 탐라지와 충훈록에 상현(詳見)하다.

선조38년 乙巳(1605) 8월2일에 졸하다. 세 자녀를 키우니 아들 用瑚 절제사와 用璉 교위와 사위 만호 玄奉儀이다. 손자가 5형제라 衛南첨정 慶南 秀南봉사 斗南 珍南이며, 증손은 汝硈(여길)훈도 汝砥 汝鏡 汝鑑 汝鈵 汝錡 汝鏑이다. 그 후로 먼 대까지 자손이 익창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이름을 나타내었다.

전적에 衡重이요 예랑에 英集이요 장령 英業은 계성사 건립을 상소하여 이뤄냈고 英樂은 동과급제했고 萬兼은 빈흥에 입격하여 첨지중추부사를 했으며 性昊와 致鏞은 함께 사마를 하였으니 부군은 과연 경덕(慶德)의 바탕이었다. 공이 안으로 자손(祚胤)을 걱정하고 밖으로 정란(定難)하시니 이른바 ‘일가의 법조(法祖)’라, 어찌 현숙한 보좌의 힘이 없었으랴. 얼마 전에 玟洙 仁奎 永權군이 장차 묘표를 세워 李膺鎬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여기서 초목(樵牧) 일을 못하게 알려 달라 하니 존경스럽구나.

1933년 음력 10월 윤달(光武後 癸酉 陽復月)에 삼황묘시정 李膺鎬가 삼가 짓고 유학 許鉀 이 삼가 쓰고, 13세손 秉炫과 14세 사손 문묘직원 基銖가 삼가 세우다.

<어휘>

△ 원훈(元勳)은 나라를 위한 가장 으뜸이 되어 임금이 아끼는 공신
△ 김인찬(金仁贊, ?~1392) 조선 개국의 공으로 중추원사·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가 되어 태조의 친병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았다. 충민·익화군(益和君)에 추봉(追封)되었다. △ 도감은 고려ㆍ조선시대에 국장(國葬)ㆍ국혼(國婚)ㆍ궁궐(宮闕) 축조(築造) 등 국가의 중대사를 관장하게 하려고 베푼 임시관청.

△ 충암집(冲菴集)은 충암(沖菴 金淨 1486∼1520)의 저서이다. 충암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사(賜死)한 조선 중기 문신·화가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보은(報恩)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淸州)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

△ 가정병술(嘉靖丙戌)은 명나라 연호가정. 가정년간 1522∼1566년 사이 병술년은 1526년. △ 선조을사졸(宣祖乙巳卒)= 선조38년인 1605년(乙巳) 8월2일에 졸.

△ 첨정(僉正)은 조선시대 각 관아의 낭청에 속한 종4품 벼슬. △ 계성사(啓聖祠)는 오성(孔子 顔子 子思 曾子 孟子)의 아버지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으로, 조선 현종 10년(1669)에 서울 명륜동 문묘(文廟) 안에 처음 건립됐다. 그러나 장령 金英業의 상소로 1854년(철종5)에 제주향교에도 계성사를 건립하게 됐다.

△ 전적(典籍) 조선 시대 성균관의 정6품직으로 성균관의 학생을 지도하는 한편, 도적(圖籍)의 수장(收藏)•출납(出納)•관리(管理)의 일을 맡았다. 사성(司成) 이하 전적(典籍) 이상은 종학 교관(宗學敎官)을 겸했다.

△ 예랑(禮郞)= 조선 때 예조(禮曹)의 낭관(郎官). 예악(禮樂)·제사(祭祀)·연향(宴享) 등의 업무를 담당했던 예조의 당하관 품계를 통틀어 이른 명칭으로, 정5품 정랑(正郞), 정6품 좌랑(佐郞) 등이 이에 속한다.

△ 장령(掌令)= 감찰(監察)업무를 담당하던 관직. 사헌부의 세 번째 벼슬로 태조 때 시사(侍史)라 하던 것을 1401년(태종 1) 장령(정4품)으로 고치고 2명을 두었다.

△ 빈흥(賓興)= 과거를 시행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

△ 첨추(僉樞)=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약칭.△ 사마(司馬)= 소과(小科) 과거시험에 합격한 진사와 생원.

△ 김수남(金秀南)공은 승사랑 제용감(濟用監)의 종8품 문관벼슬인 봉사(奉事)를 했다. 제용감은 조선 때 궁중에서 쓰는 모시, 피물(皮物), 마포, 인삼의 진헌(進獻) 및 의복과 사(紗) 나(羅) 능(綾) 단(緞)의 사여(賜與)와 포화(布貨)의 염직(染織)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 인규(31세손) 민규( 영권(33세손). △ 조윤(祚胤)은 자손을, 운잉(雲仍)은 운손(雲孫)과 잉손(仍孫)이라는 뜻으로, 아주 먼 대(代)의 손자를 말한다.

△ 초목(樵牧)은 땔나무를 하고 짐승을 치는 일. △ 이응호(李膺鎬 1871~1950)는 일제강점기의 한학자로 본관은 경주, 간옹 이익(艮翁 李瀷)의 10대손이며 오라 연미마을 귤암 이기온(橘巖 李基瑥 아들이다. 면암 최익현, 김기수 등 집의계 12인과 교유했다. 『乇羅國書』를 지었고, 나김일문에 금석문 다수와 족보서문 등을 남겼다. △ 광무후 계유 양복월(光武後 癸酉 陽復月)은 1933년 음력 10월 윤달. △ 허갑(許鉀)은 화북사람으로 일제강점기의 서예가. 1930년대 세워진 나김일문의 비문은 모두 김기수의 청탁으로 허갑이 글씨를 썼다. △ 사손(嗣孫)= 대(代)를 이을 손자. △ 직원(直員)= 일제 강점기에 향교의 가장 우두머리로 모든 직무를 관장하던 직책.

입도6세 건공장군(김성조)과 배위의 묘비(2012)

<비명 전면>

贈嘉義都摠府副摠管行建功將軍羅州金公成祖

配 貞夫人 慶州金氏 合墓

<음기 뒷면>

장군공은 휘 성조(成祖)로 나주김씨 19세손이며 입도조 낭장 휘 인충(仁忠)의 내손(來孫)이시니 公으로 인하여 나김일족이 크게 이름났다. 명종 을묘년(1555)에 남수곽 동쪽 규릉(丘陵)에서 왜적을 물리쳐 종2품 건공장군직을 받으시고 가의대부도총부부총관으로 가자(加資)되셨다. 중종 22년(1527)에 나시어 선조 8년(1575)년에 몰하시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경주김씨(1526~1605)로 교수 김양필(金良弼)의 따님이다. 2남1녀를 두시니 아들은 절제사 용호(用瑚)와 부위 용련(用璉이)요 딸은 만호 현봉의(玄奉儀)에 시집갔다. 공의 원묘는 하가리 연화 못 남쪽에 있었으나 시대변천으로 2011년 12월 26일 이곳 고내봉에 이장하면서 노형고사모르 선역(墠域)의 정부인 묘소도 이장합묘했다. 1933년에 문묘직원 김기수(金基銖)가 세운 표석이 각각 남아있다.

임진(2012) 청명절 나주김씨인충공파종친회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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