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택 칼럼](1)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
[김정택 칼럼](1)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
  • 뉴스N제주
  • 승인 2021.08.24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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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
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수필가
제주문인협회 회원인 홍창국, 김정택, 현글 작가 세 명이 한국에이즈퇴치연맹제주특별자치도지회(회장 김순택)와 뉴스N제주(대표 현달환)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한 ‘2020 제1회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심사를 진행했다
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지난 19일 본지에 실린 김정택 김정택(순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시인)이 본지에 특별기고로 올린 '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라는 내용을 싣고 본사는 '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에 대한 자료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추진위원장 이름으로 칼럼을 게재하기로 했다.

내용은 거의 자료집 그대로 싣는데 조금 부가적인 내용을 첨가할 예정이다.

한편, 추진위는 '을묘왜변의 영웅들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영웅들을 찾고 있다.

남수곽 동쪽 구릉에서 을묘왜변(1555)의 승전을 이끌었던  4인의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용사와,  왜장을 사살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

이 분들을 아시거나 조상으로 두신 종친회에서는 제보 바란다며 함께 현양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제보 HP 010-6608-6925 ,Fax 064-712-3064 ,stkiimsj@hanmail.net)

이와 같이 지금 우리 주위에는 과거 제주를 살린 위인, 혹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영웅들을 찾지 못하기도 하지만 만약 찾더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이 그냥 묻히고 마는 사례가 왕왕 있다.  '건공장군 김성조'의 비만해도 전쟁터와 전혀 관계없는 다리 위에 세워놓아 관심은 커녕 오히려 퇴색되고 있다고 추진위원회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좀 더 우리 제주에 위대한 인물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 후손이라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행정에서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연재한다. 많은 응원과 관심바랍니다.[편집자 주]

◆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 (2021년 7월 현재)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의 구성

2021년 2월 26일 고문 회장단 회의에서 김광욱 회장의 제안에 따라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다.
우선은 나주김씨인충공파종친회 산하에서 발족하고 범시민운동으로 확대한다는 원칙을 세우다.
우선 관련 역사자료를 수집하여 시민사회에 건공장군 김성조의 존재와 공헌을 알리는 콘텐츠 구축과 홍보작업을 시작하기로 하다.
최종목표를 건공장군 동상 건립과 주변 정화에 두다.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김정택
 △위  원:  김하종 김정희 김재환 김시호 김광욱 김창해
           김병립 김희현 김장영 김경국 김영구 김익수

▲김성조 장군 관련 연구 방법과 1차 계획은 다음과 같다.

△문헌조사; 건공장군 관련 역사서, 향토지, 관련인물, 발표된 문헌 등을 발굴 조사. 
△현장답사: 전적지, 묘소, 비석, 생가터 등 관련 유적지를 중심으로 답사.
△민간에 유포된 김성조 장군의 활동상, 전설 등 이야깃거리를 찾는 일
△기마돌격대 4인과 김몽근의 인물 추적
△제주도 외 지역의 사례와 연구업적, 제안서 등 수집
△자료집 발간
△김성조 장군 표준영정 초안 작성 및 전문가 의뢰
△전문가, 문필가 등의 자문, 연구, 집필의뢰
△을묘왜변의영웅현양사업회 창립총회 및 학술세미나(12월)
△도의회 및 관계당국에 동상건립 등 현양사업추진 건의

▶ 을묘왜변 전적지
△남수각 동쪽 구릉~ 신산모루, ᄀᆞ으니모루, 동문성밖(동초교~여상고)
△제주읍성; 산지천 성터, 북수구 홍문터, 오현단, 남수각
△화북포, 화북진터, 사라봉 봉화대 
△제주관아의 망경루

▶ 김성조 장군의 생가터와 묘소
△엄쟁이(엄장리)
△고내봉 나주김씨인충공파 성역

오현교 다리 동쪽 끝에 제주시가 세운 을묘왜변전적지 기념비.
오현교 다리 동쪽 끝에 제주시가 세운 을묘왜변전적지 기념비.

추진위는 "전적지 비를 다리 위에 세운 사례는 세계에 유일하다. 다리 위에서 1555년의 전쟁이 벌어졌나, 어떻게 다리 위에 전적비를 세울 수가 있는가?"라며 이 부분에서 일침을 가했다.

▲족보
 『나주김씨세보(丙戌譜』 (1946)

김성조(金成祖)는 나주김씨 19세로 입도 6세이니 강화진좌령낭장 김인충의 5세손이다. 진용교위 김윤형(金允亨 1491~1574)의 2자 중 장남이다. 중종 정해(중종 22,1527)에 생하여 선조 8년(을해, 1575) 2월 22일, 향년 48세로 졸했다. 을묘년(1555)과 병진년(1556)에 목사 김수문을 흥기하여 왜적을 남수곽에서 격파하였으니 탐라지(耽羅志)에 사적이 상견하다.

수직으로 건공장군1⁾ 행(行)가선대부도총부부총관을 받들었다(贄). 묘는 상가덕리 연화못 병좌에 있다가 2013년에 신작로가 생겨 고내봉성역으로 옮겼다. 진옹 이응호가 지은 묘표가 있다. 배는 정부인 경주김씨 (1526~1605)로 통훈대부제주교수관 김양필(金良弼)의 녀이다. 자(子)는 정략장군절제사 김용효(金用瑚 1551~1602)와 승의부위 김용련(金用璉)이다.

주1) 건공장군(建功將軍)은 조선조 종삼품(從三品) 서반(西班)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다. 보공장군(保功將軍)보다 상계(上階)이다. 해당 관직으로는 오위(五衛)의 대호군(大護軍), 훈련원의 부정(副正), 선전관청(宣傳官廳)의 선전관(宣傳官), 관리영(管理營)의 백총(百摠), 팔도의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병마우후(兵馬虞候)·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등이 있었다. 병마·수군첨절제사의 일부는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의 작호(爵號)는 숙인(淑人)이다.《대전회통(大典會通)》

김성조의 선대는 김인충(金仁忠, 입도조) 강화진 좌령낭장 → 김계전(金季全) 천호→ 김여수(金麗水) 어모장군충무위부사직 → 김지손(金智孫) 어모장군충무위부사직 →김윤형(金允亨) 진용교위의 5대 독자로 이어졌고, 고(考) 김윤형이 비로소 성조 성지의 형제를 두었다. 김성조의 아우는 어모장군 김성지(金成祉)이다.

김성조의 자는 김용호, 김용련의 형제이고, 김성지의 자는 김경기(金景麒)이며, 김용호는 김위남(金衛南) 봉직랑수례빈시첨정, 김수남(金守南) 승사랑제용감봉사, 김두남(金斗南) 장사랑, 김진남(金珍南) 만호를 낳고, 김경기는 김균남(金鈞南)2 현신교위를 낳아 위남 수남 두남 진남 균남은 각각 계파(系派)의 중시조가 되었다.

주2) 새 족보에는 김동남(金仝南)으로 되어있다. 원 이름 김균남(金鈞南)이 선조 임금 명자와 기휘(忌諱)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건공장군공 행장(나주김씨세보, 丙戌譜. 1946)

公諱成祖 系出于羅州〭 新羅敬順王季子痛國亡 棄妻子 入海印寺 爲山人 草衣終身 名曰梵空 世人高其義比於漢之北地王子 雲發封羅州君 遂爲貫籍〭  其後 有諱得章 爲高麗大將軍 是生 諱克淳大將軍 是生 諱堯瑄 儒林郞檢校軍器監 是生 諱處淵進士 是生 諱仁忠 行江華左領郎將 有高蹈遠引之志入濟州寔〭  公之五代祖 高祖 諱季全 千戶 曾祖諱麗水 禦侮將軍忠武衛副司直 祖諱智孫 禦侮將軍忠武衛副司直 贈嘉善大夫兵曹參判 考諱允亨 進勇校尉〭  妣濟州夫氏 訓練奉事協女〭  以嘉靖丁亥生〭  公于州西 嚴莊之里 第生而 岐嶷 器宇倜儻 才力超重 能文詞 善騎射 南土人士 穪以意氣男兒〭  生進敎授 慶州金公良弼 見而器之 以女妻之〭  時海醜入寇 彌月陷城〭  州牧 金秀文竪壁不出 待援兵至 而這間 民情無望生全〭  公不勝奮激 思所以禁除焉〭  聘君有健馬 而奔踶不能馴〭  公揚鞭叱之上馬 不半日 馳四百里圓幅〭  於是 倡義躍馬 入敵陣中 一身衝突 所聝甚 衆敵大驚 自相轔 藉卷曳而退南 土獲安〭  州牧 壯其功 啓聞于天陞 宣廟嘉之賜 以建功將軍之職 而褒賞之錄諸忠勳院〭  於乎盛矣〭  公有二男 長用湖定略將軍蔭節制使〭 娶鄕遂士南陽洪贄女〭  生衛南 奉直郞禮賓寺僉正〭 次用璉 承義副尉〭  娶延州玄氏億齡女〭  生慶南 秀南承仕郞濟用監奉事〭 斗南將仕郞 珍南〭 女適萬戶延州玄奉儀〭  衛南生五男 汝硈宣敎郞 汝砥 汝磾 汝구(石+瞿) 汝砰〭  慶南生二男 汝璜汝鉉〭 秀南生二男 汝鏡汝鑑〭 斗南生四男 汝鍵汝錘汝鈵汝錡〭 珍南生二男 汝鋼汝鏑〭  吁公餘慶 椒聊蕃衍 簪組繼世〭 庸知非公累仁之餘歟〭  公卒于萬曆 乙亥九月二十二日 享年四十九〭 墓在州西上加里 蓮花池上員 丙之原〭 夫人金氏生于丙戌 卒于乙巳八月二日〭 墓在廣坪高舍旨 己座之原〭 鳴乎 公之實紀 載在家牒 而年代稍遠 間經回祿 不獲擎閱 可槪何極〭  不肖後孫 景軾 懼夫愈久而愈失其傳〭  敢述遺蹟 以陳極知逾越 而其於追遠之思 自有不能已 略爲之記〭  歲己酉仲春不肖後孫 景軾⁵⁾ 恭書

<국문풀이> 공의 휘는 성조(成祖)요 나주김씨이다. 신라경순왕의 계자가 망국을 통탄하여 처자를 버리고 해인사에 입산하고 산인이 되어 초의로써 종신하니 이름하여 부르기를 범공(梵空)이라 하였고 세인들이 그 충의가 높음을 한나라 북지왕자(北地王子)에 비하였다.

휘 운발(雲發)이 나주군으로 천봉되니 드디어 본관이 되었거니와 그 후에 휘 득장(得章)은 고려 대장군이 되었으며 휘 극순(克淳)을 출산하니 대장군이요, 생남하니 휘 요선(堯瑄)으로 유림랑 첨교 군기감이요, 생남하니 휘 처연(處淵)이고 진사요, 생남하니 휘 인충(仁忠)이며 강화 좌령낭장을 행임하셨는데 고거원지(高蹈遠引)의 포부를 갖고 제주에 입도하니 공의 5세조이시다.

고조 휘 계전(季全)은 천호요, 증조 휘 여수(麗水)는 어모장군 충무위부사직이요, 조휘 지손(智孫)은 또한 어모장군충무위 부사직으로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증수 받았으며, 고 휘 윤형(允亨)은 진용교위요, 비는 제주부씨로 훈련봉사 협(夫協)의 따님이시다.

가청 정해년(1527)에 북제주 애월면 구엄리에서 태생하여 어릴 때부터 지덕이 뛰어나고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재력이 출중하고 문장에 능하며 기마 사격을 잘하여 남주의 인사들이 모두 의기남아라 일컬었다. 생원진사교수인 경주김씨 양필(金良弼)이 그를 보고 그릇으로 여기고 딸로써 처를 삼게 했다.

이때에 왜구 침입하여 한 달 만에 주성이 함락되니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은 성벽에 기대어 나아가지 못하고 원병을 기다리기에 이르자 그간에 민정은 생존의 가망이 없어짐에 공은 분격함을 못 이기고 이들을 막아 제거할 궁리를 하시었다. 장인 댁에 건마 한필이 있었는데 뒷발질하고 날뛰어서 길들일 수가 없었다. 공이 채찍을 높이 들어 질책하고 말을 타고 불과 반일이 안 되어 400리 주위를 내달았다.

이에 의분을 떨며 말을 달려 해적의 진중으로 돌입하여 일신을 충돌하며 해적의 이수를 함부로 베어나가자 적중이 크게 놀라 자기네끼리 서로 소리 지르며 짓밟고 끌어당기면서 퇴각하자 향토가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제주목사가 그 공적을 장하다하여 임금께 계품을 올리니 선조께서 가상하다 하시어 건공장군직을 하사하시고 포상하여 충훈원에 등록되니 태평성사로다.

공에 아들 둘이 있으니 장남 용호(用湖)는 정략장군이요 음직은 절제사인데 향수사남양 홍지(洪贄)의 따님과 혼인하여 장남 위남(衛南)을 낳으니 봉직랑예빈시 첨정이요, 차남 용연(用璉)은 승위부위로서 연주 현억랑(玄億齡) 따님을 취하여 4남을 낳으니, 장남은 경남(慶南)이요, 2남은 수남(秀南)이니 승사랑 제용감 봉사요, 3남 두남(斗南)은 장사랑이요, 4남은 진남(珍南)인데 따님은 만호 연주 현봉의(玄奉儀)에게 시집갔다.

위남은 5남을 두시니 장남 여할(汝硈)은 선교량이요, 2남은 여지(汝砥)요, 3남은 여제(汝磾), 4남은 여구(汝구), 5남이 여평(汝砰)이다. 경남이 2남을 출산하니 여황(汝璜)과 여현(汝鉉)이요, 수남은 2남을 낳으니 여경(汝鏡)과 여감(汝鑑)이며, 두남은 4남을 낳으니 여건(汝鍵) 여추(汝錘) 여병(汝鈵) 여기(汝錡)이다. 진남은 2남을 낳으니 여강(汝鋼)과 여적(汝鏑)이다. 아아, 공의 숨겨진 덕이여, 산초나무처럼 후손이 번성하고 관작이 대를 이어 이어지니 어찌 공이 쌓으신 어짐의 남아있음을 알지 않겠는가.

공은 1575년(선조8, 明신종 만력 1573~1619 을해) 9월 22일 졸하시니 향년 49세요, 묘는 애월면 상가리 연하못 상안 남쪽이며, 배 김씨는 1576년(병술)에 출생하고 1605년(을사) 8월 2일에 졸하시니, 묘는 제주시 광평 고사모루 동쪽이다. 오호라, 공의 실기가 가보에 게재되었는데 연대가 요원하며 그간에 화난(火難)으로 인하여 받들어 읽어볼 수 없으니 개탄함이 어찌 극하지 않으리까.

불초후손 경식은 두렵구나, 점점 더 오래되니 그 전함을 더욱 잃으리.

감히 유적을 기술하여 한도 넘게 아는 바를 다하여 늘어놓아 추념의 뜻에 스스로 어쩔 수 없을 따름임에 대략 이에 기술한다.
1909년(기유) 2월 후손 경식⁵⁾ 공손히 씀.

5) 김경식(金景軾 1870~1940)이 『나주김씨인충공파세보』 의 「건공장군공 행장」을 썼다. 영평2006번지 김최영(金最英, 나김 32세 위남공계)의 아들로 본적을 화북리 1950번지로 옮겼다. 보천교를 믿다가 1936년 10월경 강석구(姜錫龜, 봉개)의 권유로 1927년 김현범(金賢範)에 의해 창시된 민족종교인 무극대도교에 입교, 포교를 통해서 항일운동을 하면서 일본왕은 물러나고 한국은 독립된다고 설파했다. 한시 “露獨日美人莫說 結心南方布德法 崑崙富士皆我有 崗陵河海統一法”을 지었다. 1937년 구금 후 10개월 심문 끝에 검사국으로 송치, 1940년 71세에 옥사하여 기소 중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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