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시 창작강좌(119)
□운율, 소리값은 같아도 내용이 다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시대이후 인쇄된 책이 널리 보급이 됨으로써 율격의 감옥에 갇혀있던 시는 ‘자유시’라는 이름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자유시란 현대시와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자유시는 자유롭게 쓰면 되는가? 아니다. 자유시에서도 인간의 호흡이라는 운율을 무시하면 시가 갖는 미감을 살릴 수 없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인간은 말하는 갈대다.”라고 했는데 인간의 감정은 수시로 변하는 존재인데 그 모든 것을 ‘말’이라는 절대적인 삶의 가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는 이 말을 글로 옮겨서 전달하는 문학양식이므로 말의 고저와 강약, 운율을 살리는 것은 좋은 시의 밑바탕이 된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내용이지만 막상 시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운율’에 대해 물어보면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오늘은 시 짓기의 기초에서 중요한 ‘운(운韻)’과 ‘율(법칙律)’의 합성어인 운율(韻律)에 대해서 다시 복습하는 마음으로 언급한다.
“시는 인간이 살아가는 호흡이며 운율을 동원한 환희”라고 한다. 운율은 ‘소리 값은 같고 내용은 달라야 한다.’ 이 말의 뜻을 더 쉽게 풀이하자면 예를 들어서 ‘같다’라는 단어를 시에서 여러 번 사용할 경우라면 모두 다르게 해 주는 것이 ‘운’이다. 즉 "다르지 않다. 조금도 다르지 않다.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음으로써"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시는 시인의 사상과 정서를 형상화하여 보이지 않는 리듬에 담아 압축적이고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에, 같은 단어의 반복은 시에서는 해서는 안 될 작법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짧은 시에서 똑같은 단어는 다른 소리값으로 바꿔서 운을 살리든지 솎아내야 될 잡석이다.
정형시에서 '율'은 시의 형상을 잡는 중요한 틀이다, 현대시조는 그 틀의 엄격함이 많이 누그러져서 종장에서만 율격을 지켜도 될 정도로 자유시와의 구분이 모호하게 되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틀을 완전히 벗어나진 않았다. 그렇다면 자유시는 율격을 완전히 무시해도 되는가?
아니다. 보이는 외재율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외재율, 즉 리듬을 완전히 무시하면 시가 지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자유시에서도 외재율은 중요시 된다. 다만 그것이 일정한 법칙을 따를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율격의 틀은 없지만 시를 낭송하기가 힘든 시는 자유로운 외재율조차 무시한 글이 된다.
사람의 말에서 고저장단, 강약 같은 운율을 무시하면 로봇이 내는 기계적인 언어가 되듯 시에서도 이것을 무시하면 비시(非詩)가 된다.
시를 운문(韻文)이라 하고 운율이 없는 것을 글을 산문(散文)이라고 하므로 운율이 없으면 시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언어를 가장 아름답게 가꾸는 정원사가 시인이라고 하는데 기계적인 글을 쓰면 되겠는가?
다음의 시는 월간『현대시』의 발행인 원구식 시인의 시다.
시가 약간 길지만 ‘춤’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춤은 모두가 다른 춤이다. 깊은 철학적 사색이 담겨있는 이 ‘춤’의 운(韻) 속으로 들어가 볼 것을 권한다.
헤겔의 왈츠
지금 내가 추고 있는 이 춤은
혁명의 밤에서 비롯된 것이라네
슬프지 않나?
바스티유가 부서져나가고
말을 탄 유럽의 정신이
조금도 거침없이!
당~당하게
예나에 입성했을 때
철이 없는 우리 선생님은
점령군의 삼색기를 보고 기뻐하셨다네
그러니까 이 춤은
살이 떨리도록 아름다운
저 깃발 속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혁명과 상관없이 죽는 법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자유 평등 박애의 왈츠도
러시아의 눈보라에 얼어붙고 말았다네
난세였다네
영웅들이 몰락하고
그들의 여자들마저 순결을 내놓아야 하는 밤
고독한 영혼을 소유한 우리 선생님이
마침내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춤을 개발하셨다네
이름하여 정·반·합의 왈츠!
모순을 위한 모순의 춤!
놀랍지 않나?
느리고 무딘,
손재주라곤 전혀 없는 우리 선생님이
무엇이든 갖다 대기만 하면 척척 열리는
만능의 스텝을 개발해 내실 줄이야.
오, 살이 떨리도록 아름다운 밤,
숨가쁜 유럽은
새로운 삼색기로 펄럭이고
철이 없는 유학생들은
해방의 춤을 조국으로 실어날랐다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혁명과 상관없이
변증법적으로 죽는 법
말이 어눌한 우리 선생님은
난세의 구경꾼답게
그저 무심히 눈을 감으셨다네
지금 내가 추고 있는 이 춤은
혁명의 밤에서 비롯된 것이라네
슬프지 않나?
제국이 무너지고
고독한 춤꾼이였던 청년 마르크스가
한쪽 구석에서
누더기가 된 변증법의 왈츠를 수정할 때
볼가의 강변에서 태어난 레닌은
내전에 지친
조국의 인민들을 위해
애수의 러시안 왈츠를 준비했다네
격렬한 밤이 수없이 지나도
조금도 멈출 줄 모르는 난세의 춤!
그러니까 이 춤은
살이 떨리도록 아름다운
붉은 깃발 속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혁명과 상관없이 죽는 법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만인의 춤도
이제는 추억의 왈츠가 되었다네
명심하게
피가 끓는 붉은 밤이 오면
페스트보다 아름다운 죽음이
왈츠와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 이주의 디카시
무명의 꽃
이름 없이 목이 잘린 뿌리의 혼
꽃으로 피는구나
무시무시한 단두대의 꽃
_ 서승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