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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제주목성(제주본섬)을 떠난 돌하르방'
[신간]'제주목성(제주본섬)을 떠난 돌하르방'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0.12.24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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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작가의 제주 돌하르방 쉽게 이동경로 찾아갈 수 있게 정리한 스토리텔링집
핸드북 형식...현장에서 사진과 현장물 비교가능 스토리텔링 할 수 있게 얇은 표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제주의 상징, 탐라 돌하르방 역사 설화 사진 스토리텔링집이 출간됐다.

장영주(64세) 설화전문 교육학 박사가 30여 년에 걸쳐 스토리를 만들고 사진을 찍고 현장을 답사하며 제주 돌하르방에 대한 조사를 한 결실로 '제주목성을 떠난 돌하르방', '제주본섬을 떠난 돌하르방'편이 핸드북 형식으로 간단하게 손에 쥐어 현장에서 사진과 현장물을 비교하며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게 얇은 표지와 돌하르방의 이동 경로(약력)를 한 눈에 정리해 놓았다.

장영주 작가는 "'해외에 나간 돌하르방' 편은 이미 언론사를 통해 특집으로 나간 경우이지만 다음엔 직접 해외에 나가 촬영하고 스토리텔링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현재 '해외에 나간 돌하르방'은 상품화된 것을 제외하고 기념적 프로그램에 따라 세워진 나라가 8개국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툭 튀어나온 동그란 두 눈, 굳게 다문 입, 벙거지 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 머리, 구부정한 자세에 한쪽 어깨는 추켜올리고 두 손으로는 배를 감싸 안고 있는 제주의 돌하르방, 구멍이 숭숭한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터라 생김새만큼이나 질감도 독특한 돌하르방은 제주도의 상징이다.

‘돌로 만든 할아버지’라는 뜻의 돌하르방은 오래전부터 아이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말에서 영감을 받아 고 김영돈 민속학자가 돌하르방이란 명칭을 처음 쓰게(등록) 된 것으로(1997년 서부두 우정식당에서 필자가 채록한 것으로 기억) 1971년 제주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제주목성 돌하르방은 기록에 의하면 제주목사(대정현, 정의현은 현감)가 세웠다.

돌하르방의 얼굴 모양, 손 모양, 크기 등이 3읍이 다른 것은 제주목성의 돌하르방은 제주목 석수장이가, 대정현성 돌하르방은 대정현 석수장이가, 정의현성 돌하르방은 정의현 석수장이가 여럿이 모여 작품을 완성(미완성 돌하르방도 있다) 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3읍의 돌하르방은 관 주도로 돌하르방 세우기를 했다는 건 타 지방과 비교 했을 때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제주 돌하르방은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2호, 1971년에 지정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산업화의 물결로 3읍성에 세워졌던 돌하르방은 이동하여 제주목성 동문 밖에 있던 돌하르방은 KBS 제주방송총국 정문 앞에 2기(2-17호, 18호), 제주대학 박물관 앞에 2기(2-11호, 12호), 제주시청 현관 앞에 2기(2-15호, 16호),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에 2기(당시 호수를 부여 받지 못함, 1968년 이전했고 1971년 민속문화재로 지정 되며 이미 돌하르방이 떠난 시기이므로)로 총 8기가 확인되고 있다.

서문 밖에 있던 돌하르방은 관정덕 정면과 후면에 4기(2-1호, 2호, 5호, 6호),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입구에 2기(2-3호, 4호), 제주대학 박물관 1기(2-14호)로 총 7기가 확인 되고 있다.

나머지 1기(행불, 제주목관아지 뒤뜰 안내문 및 돌문화공원 안내문에는 남문(돌문화공원 돌하르방과 한 쌍을 이른 것으로 추정)에 있었던 것이라 나오는 데 남문에는 이미 8기가 확정 돼 있으므로 이 쪽 서문에 있던 돌하르방 1기가 행불 된 것으로 숫자상으로 추정됨)

남문 밖에 있던 돌하르방은 제주돌문화공원에 1기(2-21호), 삼성혈 입구에 4기(2-7호, 8호, 9호, 10호), 제주목과이지 뒤뜰에 2기(2-19호, 20호, 2011년 옮김), 제주대학 박물관 1기(2-13호)로 총 8기가 확인 되고 있다.

대정현성 돌하르방으로 △동문 밖에 있었던 것이 현 동문 밖에 4기(2-38호, 39호, 40호, 45호)△서문 밖에 있었던 것이 현 서문 밖에 4기(2-34호, 35호, 36호, 37호)△남문 밖에 있었던 것이 현 남문 밖에 4기(제2-41호, 42호, 43호, 44호)

정의현성 돌하르방으로 △동문 밖에 있었던 것이 현 동문 밖에 4기(2-22호, 23호, 24호 25호)△서문 밖에 있었던 것이 현 서문 밖에 4기(2-26호, 27호, 28호, 29호)

남문 밖에 있었던 것이 △현 남문 밖에 4기(2-30호, 31호, 32호, 33호)

돌하르방 옛 사진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는 사진, 제주시청에 데이터베이스로 정리된 사진, 3도 2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국가기록원에 행사사진(리승만대통령 내도시 관덕정에서 연설 2번 할 때 찍힌 사진 중 돋보기로 잘 살펴보면 나오는 돌하르방 사진), 개인이 소장한 사진(필자도 1974년도쯤에 관덕정에서 찍은 사진과 1995년도쯤에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앞 우측에서 찍은 사진/현재 좌측으로 이동 되었다), 1985년도에 찍은 서귀포시 바닷가 길가에 있는 돌하르방 사진, 민속사진연구회에서 2002년, 2014년에 찍은 사진 등이 있다.

이제 코로나 19사태를 맞아 제주 3읍성을 지켰던 돌하르방에게까지 마스크를 씌우는 현실에서 돌하르방이 전하는 코로나 수칙을 준수하며 민속학자도 아니오 더더욱 역사학자도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의 눈에 비친 제주목성(제주본섬)을 떠난 돌하르방을 찾아 돌하르방의 역사 설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든 책이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제언을 덧붙이고 있다.

제주목성의 둘레가 13㎞가 넘는다. 현재 남아 있는 흔적은 오현단 길에 몇 100여 m 정도 복원 된 흔적 뿐 대부분 허물어져 성 돌은 다른 용도로 쓰였다.

'제주목성을 떠난 돌하르방'
'제주목성을 떠난 돌하르방'

그러나 동문, 서문, 남문의 서 있었던 위치와 대략의 성 둘레 측정은 나와 있는 형편이므로(성문 위치가 조금 이동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를 기본 삼아 복원하기란 불가능 한 상태이니 이를 모형화 해서 1/10로 축소된 성을 쌓아 24기 돌하르방을 원래대로 재현하기를 제언한다. 물론 돌하르방의 크기 모양은 되도록 원형에 맞게 제작 되어야 함이다.

세워지는 곳 또한 동서남문모형에 8기씩 S자 형태로 해야 한다.

제주를 일컬어 1만 8000 여 신들의 고향이라 한다. 그 신들의 중심에는 설문대할망이 자리 잡고 있다. 설문대 할망의 키는 설화에 의하면 49㎞이다.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다리를 관탈섬에 걸치고 잠을 잤다는 설화를 본다면 그 키가 한라산에서 관탈섬 까지 길이와 맞먹는 것으로 볼 때 설문대할망 키가 49㎞라는 계산이 나온다. 사실 세계에서 제일 큰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의 높이는 46m이다(최근 중국에 장비 동상이 58m로 세워 졌으나 아직 여러 문제점이 있어 여기선 보류해 두고자 한다).

그러니 세계 최고 높이의 설문대할망 동상을 설화를 근거로 1/10로 축소된 49m로 세운다면 세계사에 명물 중 명물이 될 건 뻔한 노릇이다. 세계 최고의 높이 동상이 제주도에 세워지게 되는 쾌거를 이르는 것이다.

그 설문대할망 동상 속에는 1만 8천 여 신들의 모형과 스토리가 영상화 되어 있고 각종 숙박 시설과 놀이터, 게임기, 관광 상품, 식당 등 그 곳에 가면 모든 걸 해결 할 수 있는 종합 탐라국 설화 왕국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성 안에는 말타기, 방앗돌 굴리기, 연날리기 등 민속놀이 체험 한마당을 각종 민속자료를 재현하고 고공스카이버스로 한 바퀴 돌게 하늘 위에 레일을 깐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장영주 저자 약력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이며 문학평론가로 대한민국 최고기록 공무원(저술분야)으로 등재(기네스북, 저서 400여 권 중복 있음) 되었고, 신지식인(행정자치부장관)으로도 등재 됐다.

한국아동문학 작가상(1998년), 제6회 한국동화구연가상(2006년), 제29회 한국교육자 대상(2010년), 제1회 박화목 문학상(2013년)을 수상하였다.

동화섬 이사장이며 한국사진작가협회(민속사진연구)회원,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도서(개인·전자)출판 영주 대표, 평통(통일교육위원)자문위원, 대한민국독서대전·제주독서대전·작은도서관독서대전 운영위원장 3번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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