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옥 칼럼] 극순간의 예술, 이주의 디카시 감상 40_ 이창수 디카시 '튤립과 나’
[이상옥 칼럼] 극순간의 예술, 이주의 디카시 감상 40_ 이창수 디카시 '튤립과 나’
  • 뉴스N제주
  • 승인 2020.12.22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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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옥 시인
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

튤립과 나

붉은 생각은 그림자가 검다
맨땅에 뿌리내린 저 집념
이제 틀렸구나 싶다
-이창수

[해설]이창수 시인은 2000년 『시안』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귓속에서 운다』 등이 있다. 디카시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 확보로 서정적 비전을 잘 드러낸다. 이 디카시는 서정적 동일성이 영상으로 선명하게 제시돼 이채롭다.

튤립과 시인은 한 몸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튤립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비롯한다. 튤립은 나에게 타자이지만 나의 그림자와 한 몸이 된 튤립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튤립과 나는 너와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나의 관계로 전이되었다. 이 점이 이 디카시의 키포인트이다.

엄마의 품에 안긴 아가를 나와 너를 관계로 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상에는 타자이면서 '나'가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인간 관계에서는 타자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흙에서 빚어져서 흙으로 돌아가는 생에서 나와 너로 구분되는 것 같아도 중국에는 모두 다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닌가. 과학적 인식론에서는 좀 논의가 많이 비약스러운 거로 보이지만 시적 담론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튤립을 붉은 생각으로 메타포하면서 그림자가 검다고 한다. 튤립과 나의 관계가 나와 나의 관계이니 화자의 검은 그림자는 튤립의 그림자도 된다. 튤립과 나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붉은 생각은 맨땅에 뿌리내린 집념이다. 화자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틀렸구나 싶다고 진술한다. 맨땅에 뿌리내린 저 완고한 집념을 걷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 줄의 짧은 언술과 튤립과 화자의 그림자가 겹쳐져 있는 영상이 함께 고도로 집약되고 집중화되면서 붉은 튤립의 은유는 확장성을 띠면서 상징의 영역으로 뻗친다. 그러면  붉은 튤립은 붉은 생각을 넘어 함의하는 그 상징성은 무엇인가. 튤립을 나로 끌어와서 내 속의 붉은 생각으로 환치시킴으로써 화사처럼 징그러운 사념으로 드러날 만큼 그것은 강렬하고도 악마적이다. 그것은 어쩌면 인류 태초의 원죄의식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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