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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 칼럼](16)대한민국이 좁다
[경제인 칼럼](16)대한민국이 좁다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0.11.15 0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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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뉴스N제주가 창간기념에 맞춰 '제주경제인 칼럼'을 게재하는 가운데 그 첫 순서로 선보인 김택남의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라는 내용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감동의 후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이번에 올린 대한민국이 좁다'는 내용은 과거 IMF시절 사업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김택남 회장은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언급하며 굴곡진 삶을 돌이켰다.

'세옹지마(塞翁之馬)'

그렇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 있어서 행운과 불행이 왔다갔다는 하는 원동력은 좋은 사람들의 만남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기회가 왔을 때 회사 리더의 '판단'이다.

기회라는 것은 늘 자기 주위를 맴돌고 있다. 단지 그러한 기회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정보 부족으로 인해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김택남 회장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뤄진다.

그에게 사업에 대한 여러 방향을 제시하거나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한 정보나 소개를 김회장은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말레이시아까지 가게 되는 과정과 천마그룹을 인수하게 되는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정보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김회장이 수용하는 자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사업을 해 나가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오는 것이다.  물론 그 정보를 전부 믿으면 안되지만 막무가내로 외면하는 것도 안좋다. 

말레이시아에서 사업에 대한 비전을 느낀 김회장은 자세하게 기술되지는 않았지만 큰 경험을 얻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주에서의 천마를 인수하는 과정이 더욱 궁금해진다.

지금도 대한민국과 세계 어느곳에서 사업을 하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김택남 제민일보 회장
김택남 제민일보 회장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가 있다.

옛날 중국 북쪽 국경지대의 한 마을에 아들과 단 둘이 살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에게는 몇 마리의 말이 있었는데, 그것이 전 재산이었다. 어느 날 노인이 기르던 말 중에 한 마리가 심술을 부리더니, 별안간 국경을 넘어서 북쪽으로 도망갔다. 노인이 허겁지겁 말을 쫓아갔으나 날쌘 말을 잡을 수는 없었다. 노인이 터덜터덜 마을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노인을 위로했다.

“좋은 말을 잃으셔서 가슴이 아프시겠습니다.”

“큰 손해를 보셨습니다그려.”

그러자 노인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게 마련이오.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겠지요.”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쯤 지났을 때, 도망쳤던 말이 노인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아주 훌륭한 말 한 필을 데리고 함께 돌아온 것이었다. 이번에는 이웃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면서 말했다.

“정말 잘된 일입니다. 큰 횡재를 하셨군요.”

“이렇게 훌륭한 말을 덤으로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십니까?”

그러자 노인은 역시 껄껄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말이 제 친구를 데리고 돌아온 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또 나쁜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그 뒤 몇 달이 지났을 때였다. 그 노인의 아들이 새로 온 말을 타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다리를 다쳐서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그것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또다시 혀를 차면서 가여워했다.

“그 건강했던 아드님이 하루아침에 불구자가 되었으니 정말 슬프시겠습니다.”

“할 수 없지요. 나쁜 일이 있으면 또 좋은 일이 있고 그런 것이니까요.”

그 뒤 해가 바뀐 이듬해 어느 날 갑자기 오랑캐가 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마을의 젊은이들은 모두 군사로 뽑혀서 싸움터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쩔룩거렸음으로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노인의 아들은 여전히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아들을 잃은 마을 사람들은 노인을 부러워하며 말했다.

“참으로 좋은 일이 있다고 금방 기뻐할 일이 아니고, 나쁜 일이 있다고 금방 절망할 일도 아니야.”

이 고사를 보면 기쁜 일이 기쁘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쁜 일이 나쁘게 끝나는 것이 아니니, 좋은 일에 경망스럽게 좋아하지 말고 나쁜 일에 쉽게 절망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나이 자랑을 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살다보면 새옹지마라는 말을 절감할 때가 많다. 특히 사업을 하면서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기회가 될 수가 있다.

00전기의 부도는 나에게 큰 손실을 안겨주었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당시 포스코의 전기 관련 제1협력업체였던 00전기가 부도가 나자 그 물량이 태평양기전으로 몰렸다. 그 동안의 품질과 신용을 인정받아 포스코의 제1협력업체가 되었고 매출이 30억 원이 되지 않던 회사가 갑자기 130억 원의 수주를 받게 됐다.

당시 100평 남짓의 공장으로는 그 물량을 소화해 낼 수가 없어, 공장을 확장하기로 결심했다. 130억 원 수주를 큰 무리 없이 소화해 내면 손실을 만회하고도 공장을 지을 수 있는 여유가 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공장의 매물을 찾기 위해 부동산 정보지를 살펴보던 중에 공장 주소 하나가 눈에 띄었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 인비리에 위치한 2500평 부지의 제법 큰 공장이었다. 기계로 밥을 먹고 사는 내게 ‘기계면’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지금처럼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대중화되지 않던 시절, 나는 지도 하나에 의지해 기계면을 찾았다.

‘과연 이런 곳에 공장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다. 길을 잘못 들었나는 생각에 길을 묻기 위해 잠시 차를 멈췄다. 그런데 운명처럼 차를 댄 곳이 바로 내가 찾던 그 공장이었다. 붉은 벽돌집을 처음 들어설 때처럼 한눈에 그 공장이 마음에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 곳에 경비를 서던 아저씨 한 분이 보였다. 나는 아저씨께 다가가 내 사정을 정직하게 털어놓았다. 정직은 언제나 내 편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었다.

“아저씨, 제가 이 공장을 사려고 하는데요, 저 이 공장 좀 보여주세요.”

그때도 지금과 다름없는 청바지 차림이었고 경비를 서던 아저씨는 의심스러운 듯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 봤다.

“제가 이 공장을 사게 되면, 계속 관리원으로 일하게 해 드릴게요, 부탁드립니다.”

내가 용돈을 쥐어드리며 간곡하게 청하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판단했던지 경비 아저씨는 나를 데리고 공장을 안내해주었다.

단돈 300만 원으로 시작한 태평양기전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공격적인 운영을 통해서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단돈 300만 원으로 시작한 태평양기전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공격적인 운영을 통해서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2500평 부지에 1200평 건평으로 꽤 넓은 공장이었는데 크레인 4대만 남아 썰렁하기만 했다. 그런데 공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사무실 위치며, 기계실 위치며 마치 와 본 것처럼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여기면 되겠다, 나는 그 공장을 사기로 결심했다. 내가 마음에 든 기색을 보이자 안내를 맡아줬던 아저씨가 주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공장을 돌아보며 내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젊은 양반, 이 공장에 들어온 사람들 끝이 안 좋다. 터가 안 좋다고 소문났는데 괜찮겠나?”

아저씨의 진심 어린 걱정에 왠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럼 이제 운이 좋을 때도 되겠죠. 걱정 마세요.”

아저씨의 걱정에도 결국 나는 그 공장의 주인이 됐다. 그 아저씨 뿐만 아니라 공장 확장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위기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무리한 확장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업을 확장해야 되는 시기라고 판단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IMF 외환위기 사태를 겪고 있었다. 갑작스런 경기 위축으로 너나없이 어려움을 겪었지만 제조업의 피해는 어떤 분야보다 컸다.

영세한 공장들은 속속 문을 닫았고 살아남느냐, 쓰러지느냐 갈림길에 놓였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처럼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최대한 공격적으로 사업을 운영했다. 공장 확대로 작업량을 늘리고 품질 인증에 공을 들였다. ISO 9001 인증마크를 획득, 품질의 신뢰를 높이고 EQ인증으로 안정성을 확보했다. 신뢰를 지키고 품질을 향상시키자 IMF 외환위기는 오히려 나에게 기회가 됐다.

태평양기전은 품질과 신뢰로 성장해 나갔다.품질을 인정받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철저한 A/S를 시행했다.
태평양기전은 품질과 신뢰로 성장해 나갔다.품질을 인정받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철저한 A/S를 시행했다.

문을 닫는 공장의 일이 태평양기전으로 몰렸고 연 매출이 30억도 되지 않던 작은 기업에 불과했던 태평양기전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130억대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태평양기전은 포항을 넘어 전국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고 김택남 얼굴은 몰라도 포항의 태평양기전은 전기쟁이들에게 각인되었다.

그러나 나에게 기회가 된 IMF 외환위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련을 남겼다. 많은 가장들이 정리해고란 명목으로 직장을 잃었고 공장들은 원가절감에 시달리며 문을 닫았다. 또 산업체계가 재편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지명입찰로 기술력이 인증된 회사들이 경쟁을 통해서 일을 수주 받던 것이 이제는 최저가입찰로 인증된 기술보다 가격이 더 중요해졌다. 최저입찰제를 통해서 가격경쟁력을 가진 대기업만이 사업을 독식하는 현실이 되었다. 80년대 역동적이고 도전적으로 산업을 이끌었던 대기업이 보수화되면서 중소기업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형님 언제 한번 놀러오세요.”

내가 정진두 사장의 연락을 받은 것은 태평양기전의 미래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나의 현대중공업 시절 1년 후배였던 진두는 눈치도 빠르고 손도 야무진 편이라, 현대 시절부터 형, 동생 하던 사이였다. 진두도 경력을 쌓은 후에 사업을 시작했지만 IMF 외환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사업을 접었다.

국내에서 재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말레이시아로 건너가 자리를 잡았다. 제조업이 위기를 겪는 대한민국보다는 막 산업화가 시작된 말레이시아는 제조업을 하기 좋은 환경이라며 자꾸 투자를 권했다.

국내 제조업, 특히나 건설업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태평양기전도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나는 진두의 설득에 마침내 말레이시아를 방문하게 됐다.

직접 가 본 말레이시아는 내 생각보다 사업 비전이 좋았다. 중동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양거점으로 지리적 위치가 탁월했고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 비해서 정치와 치안이 안정돼 있었다.

무엇보다도 인력수급이 수월해 제조업을 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불투명했던 태평양기전의 미래가 말레이시아에서 보였다. 나는 2006년 말레이시아 투자를 결정하고 진두와 더불어 퍼시픽MK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요구하는 품질보증을 위해서 영국의 UKAS, 일본의 JIS, 인도의 ERDA와 CRPRI 등의 품질 인증서를 획득하고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는 말레이시아를 바탕으로 태평양기전을 전기업계의 대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런 능력도 자신도 있다고 믿었지만 인생은 늘 새옹지마, 뜻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내가 제주도에서 천마를 인수 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알지 못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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