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이 칼럼](9)과거와 다른 현재를 만들어 주는 이들
[현금이 칼럼](9)과거와 다른 현재를 만들어 주는 이들
  • 현달환 기자
  • 승인 2018.11.15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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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den Maple
"인생의 멘토, 다섯 정도이나, 둘은 이미 고인...다른 셋의 얘기 하고 싶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인물 한두 명 정도는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그 상대는 책으로 만나왔던 위인이거나 성인일 수도 있고, 때론 철학자이거나 자수성가한 기업가 혹은 저명인사, 학교스승 등 다양한 직업군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롤모델이나 멘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멘토의 사전적 의미는,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정신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현명한 상담 상대로,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조언해주는 사람이다.

나의 경우,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한 그들을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하므로 멘토로까지 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내 경험치를 근거로 세상에는 과장되고 부풀려져 있는 게 다반사인지라…

그 친구의 답은 명료하고 단순하다

물론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의 멘토가 꼭 완전무결한 사람일 필요는 없을 것이나 그래도 그 인물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필요하며, 그 잣대 또한 각자 다를 수 있음은 당연하다.

누군가 내게 한가지 기준을 묻는다면, 그가 지금까지 걸어 온 삶의 궤적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가 지금 아무리 훌륭한 모습으로 미래에 대한 장밋빛 약속을 할지라도 그걸 믿을 방법은 없다. 얼마나 일관된 말과 행동을 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그의 과거만이 오직 그를 정직하게 대변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걸어 온 길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숨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만의 확고한 기준을 근거로 내 인생의 멘토라고 칭할 수 있는 인물은 다섯 정도이나, 둘은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이라 언급만으로도 마음이 짠해져서 애써 외면하고 싶고, 다른 셋의 얘기를 하고 싶다.

첫번째 인물은, 비록 책과 미디어를 통해 오랫동안 알게 된, 한 때 정치인이며 지금은 지식 소매상이기를 자처하는 인문학 작가인데 물론 그는 나를 모른다.

어떠한 사적 인연이 없이 그저 그가 쓴 수많은 책들에서 그의 철학과 가치관에 매료되었고, 그가 정치에 몸 담았을 때 토해냈던 수많은 화려한 언변, 젊은 시절 보장된 미래와 타협하지 않고 늘 힘든 길만을 앞서 걸었던 젊은 시절의 객기, 본인의 천재성을 넘어선 동지의 능력을 인정하는 쿨함까지….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학자들을 마주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들과 타협하게 되고 때론 소신보다 이익을 취하는 게 당연시 되는 시대임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지금껏 일관되게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그를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와의 나이 차이가 열살 이내인데도 지식의 차이는 수백년도 넘을 것으로 판단되어 엄청난 자괴감에 시달린 적이 많다. 내게 한번의 생이 다시 주어진다고 해도 도저히 그와 같은 삶을 살 자신이 없는 관계로 그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선에서 타협하고 싶다.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는 근거없는 비방과 비난에 굳이 변명하기보다 말과 행동으로 그들이 틀렸음을 증명해 보였고, 결국 반대하던 이들의 맘까지 얻어 이젠 넉넉한 마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아 편해진 그를 보며, 세상이 그를 빨리 몰라준 것에 대해 가졌던 노여움이 조금은 사라졌다.

별 의미 없이 보낼 뻔했던 내 40대의 여정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고 배움을 멈추지 않게 하여, 미비하나마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해 준 고마운 존재이다. 그를 알지 못한 채 살아냈을 과거의 시간을 거쳐 맞을 현재는 상상하기 조차 꺼려진다.

내가 지껄여대는 어줍짢은 지식이나 정보의 대부분은 이 사람을 통해 얻었으나 아직 내면화되지 않아 한없이 어설퍼서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가 앞으로도 많은 저서를 통해 자기성찰에 굶주린 나와 같은 소비자들에게 지식을 파는 소매상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주기 바란다.

앞으로도 그의 행보를 지켜볼 것이며 그가 책을 통해 쏟아내는 얘기들을 나는 그저 감사히 받아 내 소양을 키우고 건강한 가치관을 형성해나가는 것으로 답례할 것이다.

두번째 멘토는 바로 내 아버지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자기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하겠지만 내가 아버지를 멘토로 삼는 이유는, 좋은 남편이어서도 아니며 훌륭한 아빠이어서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평범하시지만 좋은 사람이어서이다.

좋은 사람이란 노력한다고 쉽게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원래 좋은 결을 지닌 사람이 따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장기간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임에도 사회에서는 너무나 다른 모습들로 살아가는 걸 보면 말이다.

나이들면 성숙해지고 유순해져서 다 좋은 어른이 되는 줄 알았던 내가, 학벌이나 재력, 나이에 상관없이 비상식적 행동을 하는 많은 어른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특별하신걸 뒤늦게 알았다.

35년생이신 아버지에게는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과 분노가 있고, 때론 해탈을 경험한 선지자의 모습도 있으며, 정치적 소신을 밝히실 땐 나랑 1도 교감이 안되는 전형적인 꼰대의 모습도 있다. 종종 은행이나 관공서에 들리셔서 나이를 무기로 인사성없는 직원을 꾸짖기도 하실 땐 정말 챙피하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이득에 매우 인색하며 남이 보든 안보든 남의 어려움에 눈 감지 않고, 타인에 대한 험담을 일삼치 않으시며, 젊으셨을때부터 나이든 사람에게 참으로 친절하시고 아이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으신다.

더우기 상대의 부를 탐하지 않으시고 물질적이 되어가는 현시대를 진정 염려하시는 멋진 아버지의 모습에서 공공의 선을 우선으로 삼는 바람직한 공동체의 구성원을 보게 된다. 자신의 혈육을 위하는 건 인지상정이나 모두가 가족을 우선 순위에 둔다면 가족이 없는 이들은 누가 그들의 방패막이 되어 줄 것인가.

내 자식 또한 가족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수도 있으므로 누군가는 아버지같은 역할을 하는 이들이 존재할 때 세상은 한결 살만한 곳이 될것임이 자명하기에 나 또한 기꺼이 그 길을 택할 것이다. 가족하나 못 챙기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라는 비아냥도 있겠지만 사람은 다 저마다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므로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할 수는 없다. 특히 게으름을 죄악시하시며 늘 자신을 개발하기에 멈춤이 없으시고 책과 신문을 가까이 하시고 사회적 이슈에 귀를 기울이시며, 평생 종교 한번 가지신 적이 없으시나 매주 고해하는 여느 종교인들보다 내게 울림을 주신다.

아들과 딸을 어떤 경우에도 달리 대하지 않으셨고 누구든 배움의 뜻이 있는 자식에게는 끊임없는 응원을 보낸신 분이다. 노력만으로 도저히 지닐 수 없는 그 분의 유전인자를 고스란히 받고 싶다. 이 담에 내 자신 또한 누구의 훌륭한 아내로 혹은 누구의 현명한 엄마로 기억되기보다 참 좋은사람으로 누군가에게 각인되고 싶다. 내가 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하듯이…

마지막으로 멘토를 삼고 싶은 이는 이민와서 인연을 맺게된 동년배 친구다. 나이는 좀 위지만 우리 둘 다 나이 운운하며 호칭이나 대접에 예민한 꼰대들을 혐오하기에 은근슬쩍 맞먹는 사이가 되었다. 커서 만난 친구는 학교에서 만난 친구보다 진실되게 사귀기 힘들다는 보통의 관념을 깨는 동기를 제공한 존재이기도 하다.

보통의 경우 나보다 잘 나면 질투가 나기 마련이지만 난 이 친구에게 칠투가 나지 않는다. 친구의 슬픔을 나눌 수는 있어도 기쁨을 같이 나누는 건 힘들다고 하지만 난 이 친구가 기쁘면 나도 진심으로 기쁘다. 긴장을 없애주기도 하지만 나를 각상시키고 긴장시키기도 한다.

머리가 복잡해서 쉽게 판단 내리지 못하는 일도 그 친구의 답은 명료하고 단순하다. 때론 허무할 정도이지만 지나보면 퍽 현명한 선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친구의 말이나 선택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내 말은 번지르하나 알맹이가 없고 공허하기까지 하다. 시쳇말로 뇌피셜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고 그 이가 사회생활 경험이 나보다 풍부해서도 아니고 세상일 많이 겪어서도 아니다. 그냥 타고난 것 같다.

그 친구 앞에선 부끄러움이 줄어들고 경계심이 많이 사라진다. 내 치부까지 드러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내 자신에 깜짝 놀랄때가 많다.

10년 동안 그는 늘 일관되게 말하고 행동한다.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인 내가 그리 판단한다는 건 신빙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읽은 책에 의해 때론 만난 사람에 의해 혹은 시청한 영화에 의해 생각이나 가치관이 자주 변하는 편이고 정제되지 않은 정보들이 머릿속에 뒤죽박죽 엉켜 있는 편인데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정리되곤 한다. 때론 생각이 달라 서로의 주장을 내 세우지만 그의 논리에 끝내 납득이 되는데, 실제로 그는 그렇게 말한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영민한 남편의 조언에 가끔 ‘그러는 너는’ 혹은 ‘너나 잘 해’ 라며 속으로 궁시렁 거리기도 하는 이유는 말뿐인 경우가 많아서이다. 보통 설득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남의 의견을 무시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나 이 친구는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넓은 아량도 지니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를 친구 이상으로 믿고 맘속에 길잡이의 자리를 기꺼이 내주었다.

종종 아들과 힘겨루기하는 나를 다룰 때는 꽤 성숙한 엄마의 모습으로, 남편에게 연연하는 나의 찌질함에는 능수능란한 아내의 모습으로, 나의 미숙한 점을 지적하고 깔끔한 조언을 하기도 한다. 반면 동성애나 찬반의 문제를 지닌 사회적 이슈를 말할 때는, 무척이나 개방적일것으로 예측되는 겉모습과는 달리 지극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모습까지 보이는 반전의 매력 또한 지니고 있다.

같이 나이들어 가고 있지만 누구보다 그 친구는 나이에 맞는 고운 모습으로 변해갈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내일도 그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 틀림없으므로.

내게는 여전히 많은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팔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이렇게 든든한 상담 상대 혹은 조언자를 둔 난 행운아임에 틀림이 없다. 이 담에 며느리 흉까지 맘놓고 볼 수 있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내가 무논리로 대응해도 궁극적으로 그 친구는 완전한 내 편이 되어 날 응원할 것이 확실하기에 그 앞에서는 가식이나 떨면서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으니 이 또한 얼마나 맘편한 일인가.

이 글을 읽고 그가 지을 표정이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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