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옥 칼럼]극순간의 예술, 이주의 디카시 감상 20_ 조민의 디카시 '나무의 입'
[이상옥 칼럼]극순간의 예술, 이주의 디카시 감상 20_ 조민의 디카시 '나무의 입'
  • 뉴스N제주
  • 승인 2020.08.05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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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옥 시인
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

나무의 입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백 년을 산 나무는
가슴에 동그란 입을 갖다 달았다
온 동네 사람들은
이 나무 말을 귀담아 듣는다
-조민

[해설] 2004년 9월에 디카시집 『고성 가도(固城假道)』 후기 에서 “어둔 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면, 시가 생각나지 않는가. 별은 시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가의 순결한 눈빛을 보면, 시가 생각나지 않는가. 아가의 순결한 눈빛은 시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산 속에서 이름 모를 꽃을 만나면 시가 생각나지 않는가. 꽃은 시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는 아름답고 맑고 진실한, 삶의 가장 가치로운 것들의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나의 자작시 해설의 글을 인용하며 처음으로 나름의 소박한 디카시론을 펼쳤다.

디카시라는 신조어를 사용할 때 시라는 것이 꼭 시인의 상상력으로 창작해낸 것만이 아니라 자연이나 사물에서 아직 언어화 되지 않았을 뿐이지 도체에 시적인 형상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했다.

나는 그것을 ‘날시’(raw poem)라는 신조어로 만들어 썼다. ‘날시’는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예술적으로 재구성, 혹은 변용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시적 형상을 이르는 말이다. 디카시는 관념이나 언어 이전의 ‘날시’를 순수 직관의 스마트폰 디카로 찍어 문자의 옷을 입혀 소통하는 것이다.

오규원 시인이 사용한 ‘날이미지시'가 있다. 날이미지시는 사변화되거나 개념화되기 이전의 의미, 즉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를 존재의 현상에서 찾아내어 이미지화하는 시를 말한다.

날시는 오규원의 날이지미시의 약자처럼 보이지만 날시는 날이미지시와 개념 자체가 다르다. 디카시에서 말하는 날시는 시인이 포착한 시적 형상의 피사체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문자시로 말하면 날시는 일종의 착상과 유사한 개념이다. 문자시는 시적 영감으로 착상하는 것이 시의 씨 즉 시의 종자를 얻는 것이지만 디카시는 문자시의 창작 방법과는 달라서 시적 영감으로 포착하는 착상 자체가 시의 종자를 넘어서 거의 온전한 시의 몸 전체라고 봐도 좋다.

이런 점에서도 디카시의 ‘날시’는 문자시의 착상이 의미하는 시의 종자 개념보다는 훨씬 넓은 개념이다

자연이나 사물에 깃든 보석 같은 시적 형상들이 자신을 호명해줄 시인을 찾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인의 눈으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디카시의 시인은 조민 시인의 디카시 <나무의 입>의 ‘스피커’라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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