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 칼럼](1)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프롤로그
[경제인 칼럼](1)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프롤로그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0.08.01 18:0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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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작지만 강한 제주만들기 새로운 꿈꾸다"
사단법인 제주특별자치도발전포럼(공동대표 김태환, 김택남)이 4일 제주KAL호텔 오후5시부터 열려 ‘제주특별자치도의 방향과 과제’를 모색하는 세미나를 개최했다.(사진제공 김택남 공동대표)
김택남 회장

1959년 제주시 한림읍에서 태어난 제민일보 김택남 회장은 꿈을 꾸는 사람이다. 한림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78년,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가슴에 품은 소년 김택남은 나고 자란 제주에서 육지로 떠나며 바다처럼 푸른 꿈의 그물을 던졌다.

"천형(天刑)처럼 옥죄던 가난을 떨쳐내고 남부럽지 않게 성공하는 것, 그리고 언젠가 고향 제주로 돌아오는 것."
열아홉 살 소년은 말 설고 물 다른 육지에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쉼 없이 도전했고 그가 다루는 전기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빛을 밝히듯이 그의 삶에 빛을 밝혔다.

최선을 다한 그의 도전은 그에게 성공의 문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20대 초반, 현대중공업에서 전기기술자로 실력을 닦고 20대 후반, 포항종합제철엔지니어링에서 전기 기술자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서른두 살의 나이에 사업을 시작하여 어린 시절의 꿈을 이뤘다. 그리고 지난 2007년 귀향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제주 토종기업 '천마물산'을 인수하며 고향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열아홉 살에 던졌던 그물보다 더 크고 질긴 꿈의 그물을 던졌다.

지천명,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에 시작된 그의 꿈은 고향 제주를 향하고 있었다. 제주의 통합과 발전을 꿈꾸며 2008년 제민일보를 인수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모아가기 시작했고 '2013년 WE♥프로젝트'를 통해서 제주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제주발전은 제주도가 가지고 있는 향토자원과 제주민의 잠재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작지만 강한 제주를 만드는 자신의 새로운 꿈을 위해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뉴스N제주는 ‘경제인칼럼' 첫 순서로 제민일보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를 엮은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의 자서전 스토리를 게재합니다.

김택남 회장은 판포초등학교, 한림중학교, 한림공업고등학교, 동국대학교 경영학과, 동국대학교 경영대학원(경영학 석사)을 나왔다.

가난이라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성공이라는 꿈을 포기 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 당당한 제주의 중견기업인으로 자리매김한 김택남 회장의 인생스토리를 보면서 제주인의 부지런함과 끈질긴 근성으로 도전과 양보라는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모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돼 어렵게 승낙을 받아 독자들에게 자랑스러운 제주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됐다.

지금 앞이 캄캄하고 성공의 문턱에서 주저앉는 젊은 청춘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리라 생각되며 뉴스N제주에 칼럼을 혼쾌히 게재를 허락해주신 김택남 회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매주  월요일마다 게재되는 인생스토리를 독자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필독이 있기를 기원합니다.[편집자 주]

사단법인 제주특별자치도발전포럼(공동대표 김태환, 김택남)이 4일 제주KAL호텔 오후5시부터 열려 ‘제주특별자치도의 방향과 과제’를 모색하는 세미나를 개최했다.(사진제공 김택남 공동대표)
김택남 회장(오른쪽 사진)

[포롤로그:꿈의 두 날개 '도전과 양보']
어린 시절 내 꿈은, 곤밥을 실컷 먹는 것이었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 누구나 그렇지만 흰 쌀밥을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매일 깔깔한 보리밥이 지겨웠고 가끔 제사 때나 얻어먹는 곤밥을 실컷 먹는 것이 내 어린 날의 꿈이었다.

내가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내 꿈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었다. 국회의원이 뭐하는 사람인지 잘 몰랐지만 집집마다 붙어있는 달력에는 국회의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딱히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기보다 남들에게 무언가를 나눠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열여덟 살에는 높은 빌딩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실습을 하기 위해 올라간 서울에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빌딩을 구경했다. 이런데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그런 빌딩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열아홉 살에 육지로 나가 터를 잡았을 때 나는언젠가는 사업가가 되리라 마음먹었고 성공을 하면 내가 하던 사업의 터를 제주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나는 가난한 빈농의 자식이었고 내가 가졌던 꿈은 막연한기대, 환상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꿈을 한번도 버린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버리지 않은 꿈은 나에게 자꾸 길을 내주었고 내가 가졌던 꿈은 조금씩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물론 꿈을 꾸기만 한다고 해서 현실이 되지 않는다. 꿈은 지독한 편식장이라 도전만을 먹고 자랐다. 열아홉 살에 달랑 3500원을 들고 육지에 가서 터를 잡고 창업을 해 남부럽지 않은 사업을 일구기까지 늘 내 앞에는 크고 작은 도전이 놓여 있었고 나는 한 번도 뒤돌아서거나 움츠려 든 적이 없다.

가끔 시련이 몰려와도 나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나를 위로했다. 힘은 생각에서 자란다. 안된다고 포기하는 순간 힘은 사라지고 도전 앞에 무릎 꿇게 된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언제나 나에게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었고 조금 더 큰 도전을 가능케 했다.

'제주소년, 꿈을 투망하다' 표지
'제주소년, 꿈을 투망하다' 표지

그러나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꿈은 도전만으로 거둘 수 없다. 누구도 혼자서 살 수 없고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성공한 사람도 없다. 말 설고 물 다른 객지에서 내가 사업을 일군 5할의 힘은 양보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투는 데는 영 소질이 없었다. 친구들과 싸움이 있을 때도 때리는 것보다는 맞는 편을 선택했다. 우리 아버지는 맞고 다니는(?) 막내아들에게 분통을 터뜨리셨지만 아버지를 닮은 성품이니 어쩔 수는 없다.

나는 남이 손해를 보는 것보다 내가 손해 보는 편이 마음 편했다. 주변에서는 성공을 하려면 모질어야 한다는데 나는 모질고 독하게 구는 것이 불편했다. 갈등이 있으면 손해를 보고 다툼이 있으면 먼저 사과를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내 곁에 몰려들었다. 작은 손해에 분하고 억울해 했다면 사람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내게 마음을 열어 준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언제나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나만 옳다는 사람, 내 것만 챙기려는 사람은 늘 외롭다. <초한지>에서 ‘여불위’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남는 장사가 ‘사람 장사’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을 얻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양보와 겸손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는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큰 장사를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가난한 한 청년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치렀던 수많은 도전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양보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꿈’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듯이 우리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특히나 도전정신과 양보의 미덕을 잃은 요즘 청년들이 이 책을 통해서 도전과 양보의 힘을 깨닫고 꿈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빈다. 특히 나의 아들과 딸들에게 아빠가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열아홉 살, 제주를 떠날 때 나는 바다처럼 푸른 청춘이었고, 그보다 더 푸른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천형처럼 주어진 가난을 떨쳐내고 우리 가족들이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도전과 양보’라는 날개로 힘차게 날았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바다처럼 푸르렀던 청춘은 빛이 바랬지만, 그 꿈의 빛마저 바란 것은 아니다. 지천명,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에 꾸는 꿈은 지나간 내 세월과 경험을 통해서 더 크고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기에 나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기다려진다. (See you at the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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