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칼럼](13)고난 속에서도 큰 업적을 이룬 정약용
[김성훈 칼럼](13)고난 속에서도 큰 업적을 이룬 정약용
  • 뉴스N제주
  • 승인 2020.07.25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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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수필가
김성훈 수필가
김성훈 수필가

조선 정조시대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정약용은 22세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28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정약용이 23세가 되었을 때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이 정약용에게 천주교를 전도하였다. 당시에 천주교는 유교 사상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보아서 엄히 금하고 있었다.

다만, 정조는 “사교(邪敎)는 자기 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라고 말하였듯이 성리학이 올바른 것이므로 삿된 천주교는 스스로 없어질 것이니 탄압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갖고 있어서 비교적 천주교에 관대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부터 천주교에 대한 강력한 박해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참수를 당하였으며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거리를 둔 점이 확인되어서 유배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올랐는데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과 자식들에게 보낸 서한 등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약용은 천주교도였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하여 생명을 지켰다. 정약용은 후일 배교 행위를 반성하였으며 1784년 천주교회창설부터 1801년 신유박해까지의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천주교서인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를 저술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약용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는 현재까지 그 사본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다만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ée)’와 다블뤼(Daveluy)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Notes de Mgr. Daveluy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에 정약용이 남긴 ‘조선에 복음이 들어온 것에 관한 회상록(des mémoire sur l'introduction de l'Evangile en Corée)’을 인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정약용이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를 저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블뤼(Daveluy) 주교의 기록을 보면 “유배가 풀려 돌아온 뒤, 정약용 요한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교회의 모든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1801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입으로 배반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쳐 세상과 떨어져 살며, 거의 언제나 방에 들어앉아 몇몇 친구들밖에는 만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대재(大齋)를 지키고, 그 밖에 여러 가지 극기를 고행하며 몹시 아픈 쇠사슬 허리띠를 만들어 차고 한 번도 그것을 끌러 놓지 않았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묵상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정약용이 1804년 유배지 강경에서 쓴 독소(獨笑)'라는 시는 아련한 비애를 느끼게 한다.

홀로 웃는다(獨笑)

유속무인식(有粟無人食 ) - 양식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다남필환기(多男必患飢) - 아들 많은 집엔 굶주림이 있다네.
달관필준우(達官必準愚) - 높은 벼슬아치는 꼭 어리석고
재자무소시(才者無所施) - 인재는 재주를 펼칠 기회가 없네.
가실소완복(家室少完福) -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지도상릉지(至道常陵遲) - 지극한 도는 항상 쇠퇴하기 마련이네.
옹색자매탕(翁嗇子每蕩) -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부혜랑필치(婦慧郞必癡) - 지혜로운 아내에겐 바보 남편이 있네.
월만빈치운(月滿頻値雲) -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화개풍오지(花開風誤之) -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오네.
물물진여차(物物盡如此) - 세상사가 모두 이와 같으니
독소무인지(獨笑無人知) - 내가 홀로 웃는 걸 누가 알리오.

정약용이 천주신앙을 저버렸다는 것은 큰 아픔이었을 거이고 또 다른 아픔은 자식들에 대한 연민이었다.

정약용은 5백 여권이나 되는 책들을 남겼는데 유배된 강진 만덕산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초당을 중심으로 동암(東庵)에는 정약용이 기거하고 서암(西庵)에는 제자들이 머물렀다. 이곳에서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 나는 논밭을 너희들에게 남겨 줄 만한 벼슬을 못 했으니
오직 두 글자의 영험한 부적을 주겠으니 너희는 이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라.
내가 주는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다른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이나 기름진 토지보다 나은 것이니
평생을 두고 필요한 곳에 쓴다 할지라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내 역경에 굴복하지 말고 바르게 살도록 이끌었다.

누구든지 자식에 대한 연민과 종교를 저버렸다는 고뇌 속에서도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긴 정약용에게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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