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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제목이 좋은 시는 이미 절반의 성공"
이어산, "제목이 좋은 시는 이미 절반의 성공"
  • 뉴스N제주
  • 승인 2020.07.10 22:24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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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칼럼]토요 시 창작 강좌(94)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시 창작 강좌(94)

□퇴고와 시 쓰기

이어산시인, 평론가

시에서 최고의 경쟁력은 재미있거나 감동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바 있다. 그런 것이 없으면서 길게 쓴 시는 질리게 되고 재미없는 짧은 시는 쓰레기통에 던져진다.

시의 초보자나 젊은 사람이 짧게 쓰거나 인생을 달관한 듯 쓴 시는 공허하거나 염치가 없는 시가 될 수 있다.

독자가 시를 읽을 때 통상적으로 20행 내외의 길이가 가장 알맞다고 한다. 더 길게 쓰거나 짧게 쓸 수 있지만 습작 기간에 이렇게 길이를 맞춰보는 것도 권장 된다.

이 길이는 연갈이를 하면 보통의 시집 두 페이지 분량이다.

초보자는 우선 시를 길게 써놓고 필요 없는 잡석을 골라내듯 줄여서 퇴고를 하는 방법이 좋다.

일필휘지로 단숨에 쓴 시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성공한 시인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쓴 시가 좋은 시로 기억되는 것도 있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다. 퇴고는 시를 단단하게 하는 지름길이며 시를 배우는 사람의 정도이고 의무다.

어느 날 지인이 시를 좀 봐 달라기에 어색한 부분이 있어서 “퇴고를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당연히 퇴고를 했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퇴고를 했냐는 물으니 "시를 써놓고는 밤새도록 몇 번이나 고쳤다"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그게 바로 초고다"라고.

초고(草稿)란 초벌 원고, 즉 처음 쓴 시다. 밤새 쓴 글은 거의가 초고다. 밤을 새워서 썼던 작품이라도 다시 다음 밤을 새워가며 살펴보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다시 고쳐서 완성한 것이 첫 번째 퇴고다. 그렇게 몇 번의 수정을 거친 후 “더 이상의 표현을 도무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 때 다시 자기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에게 보여 주어서 지적을 받아보고 한 번 더 살펴본 후 발표를 해도 늦지 않다.

퇴고를 할 때는 자기와 실력이 비슷하거나 시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작품을 봐 달라고 하면 안 된다.

그런 자세는 현시욕(現示慾)일 수 있다. 위로 향한 퇴고를 해야 한다. 아래로 향한 퇴고는 오히려 시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이 꼭 버려야 할 것은 퇴고를 싫어하는 고집이다.

대부분의 유명 시인들이 한결 같이 퇴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신중하게 작품을 쓰라는 것이다.

고급 작품은 이런 퇴고의 노력 끝에 나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신의 소설을 퇴고하면서 마침표 하나를 찍기 위해 보름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노인과 바다'라는 걸작이다.

다음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돌아오기

강희근

윤이상이 돌아오고 있다
그의 아내*가 가리키는 산청군 시천면
구 덕산장터 생가터로 일신 돌아오고 있다

업적이 있는 사람은 늘 생가나
생가의 들머리까지 돌아오는 시간이 길다

죽은 뒤에 돌아오는 사람은
슬픔도 그 돌아오는 길에서 하나하나 반짝이는 것들
주워들고 온다

슬픔뿐이겠는가 외갓집의 곤고했던,
천왕봉 내리는 바람에 펄럭였던, 다 헤지고
닳아버린 가풍의 주름살들
어김없이 그의 멜로디에 업히어 함께 돌아오고 있다

오늘은 비가 멎고
산과 산 사이, 강과 골 사이
이내嵐*만 들락거리며 윤을 내던 길로 윤이상
그가 돌아오고 있다

산청의 아들, 산청의 풀피리 닐릴리 불며
옛날의 촌사람 하나
오매야 오매야
일신 돌아오고 있다

아내* ->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 여사
이내嵐* -> 이내 : 비 온 후의 더할 수 없는 깨끗한 상태(Shining Green)
嵐(남기람) : 아지랑이 같은 기운

시를 발표한다는 것은 독자에게 시집가는 것이다. 시의 제목은 신부의 얼굴이다. 모든 독자는 제목부터 읽는다.

제목이 성공하면 그 시의 반은 성공한다. 내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제목은 절대 달지 않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가을 밤’으로 제목을 삼았다고 하자.

그 시는 읽으나마나 가을밤에 대한 설명인 것으로 짐작되어진다. ‘금강산의 사계’라던가 ‘내 어머니’라는 제목도 마찬가지다.

내용이 특별할지라도 벌써 제목이 진부하여 실패한 시가 된다.

이처럼 직설적인 제목은 그 제목에 예속되어서 시의 확장성에 문제가 생긴다.

■ 디카시 한 편 감상

브래지어

빨간 속옷을 입었야
돈이 붙는다는 소문에
당장 빨간 브래지어를 입었다

- 조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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