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성리학(性理學)이 사회를 움직이는 근간이 되는 주류 사상이었다. 성리학(性理學)은 이(理)와 기(氣)의 흐름을 중심 원리로 보고 우주와 자연, 인간, 사회의 존재에 대한 이치를 설명하는 기본 이론체계이다.
성리학에서 이(理)와 기(氣)의 상호관계를 ‘이기불상리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離 理氣不相雜)’이라고 설명하는데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나,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성리학의 세계관을 두고 이퇴계와 이율곡은 학문적으로 논쟁하였다.
이퇴계는 이율곡보다 35년 연상이었다. 이퇴계는 이(理)를 중시한 이념 중심의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고 이율곡은 현실 중심의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였다.
이퇴계는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하였는데,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순선(純善)인 사단(四端)은 이(理)가 작용한 결과로 보았다.
즉, 남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고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거짓을 미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인 시비지심(是非之心) 등을 축약해서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한다. 이퇴계는 이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이 이(理)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사람의 감정인 칠정(七情)은 기(氣)의 작용으로 보았다. 사람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희(喜), 로(怒), 애(愛), 락(樂), 애(哀), 오(惡), 욕(慾)의 일곱 가지 감정인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일어난다고 보아서 기를 더 중요하게 본 것이다.
이퇴계는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四端)은 사람의 근본으로 지극한 선(善)이며 희(喜), 로(怒), 애(愛), 락(樂), 애(哀), 오(惡), 욕(慾)하는 일곱 가지 감정인 칠정(七情)은 제어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퇴계는 우주의 기본원리인 이(理)를 중시하였으므로 이를 이념 중심의 주리론(主理論)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율곡은 이 세계의 일체존재는 이(理)와 기(氣)로 되어 있고, 그 형태는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고 표현하여 기(氣)가 발하면 기(氣) 위에 이(理)가 올라타 있는 상하의 구조로 보았다.
이율곡은 발하는 것은 기(氣)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理)라고 하여 기발이이승지의 한 길 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에서 생기는 것이라 고 하였다. 여기에서 칠정이 생기고 사단은 칠정 중에서 선한 것만을 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율곡은 당파(黨派)간 갈등이 국정을 혼란하게 한다고 보고 지나친 정쟁을 완화시키려고 노력 하였다. 그러나 효과적으로 정쟁을 조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인과 서인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퇴계와 이율곡은 모두 천재로 태어났다.
이퇴계는 6살 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논어`를 공부하였으며 19세 때 `성리대전`을 통독하고 이해하였다. 20세에 `주역`을 연구하였으며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에 요즘으로 치면 대학 총장인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퇴계는 정삼품 당상관인 부제학에 오르고, 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며 67세에 예조판서에 임명 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으며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율곡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는데 3세에 이미 글을 깨우쳤고 4세 때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의 첫 권을 배웠으며 8세 때는 화석정(花石亭)에서 ‘팔세부시(八歲賦詩)’를 지어서 문필가의 뛰어난 소양을 보여주었다.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 15세 때에는 유교 경서와 다른 책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자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묘막에서 불교 서적을 읽고 3년상이 끝난 19세에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서 석담(石潭)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입산 1년 만에 환속하여 다시 성리학을 탐독하였다. 이율곡은 13세 이후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9번 급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이율곡은 평생 동안 대사간을 9번이나 역임하고 결국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동인에 속하였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서인에 속하였다. 그러나 이율곡은 동인, 서인이 모두 학문을 연구하는 선비들이므로 시국관, 환경, 의견의 차이, 개인의 사상, 관점 차이가 다를 수 있으므로 지나치게 비생산적인 논쟁을 중단하고, 같이 조정에서 생산적으로 국사와 민생문제를 논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동인과 서인 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서 이율곡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율곡이 말하였듯이 사람들의 시국관, 환경, 의견의 차이, 개인의 사상, 관점 차이가 다를 수 있다. 다름을 존중하는 풍토위에서 생산적이고 아름다운 사회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주리론에서 이타적인 사람의 선한 본성을 중시하였듯이 주기론에서도 사람의 선한 본성을 실현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근원적인 출발점에 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람들이 선한 본성으로 살게 하고 선한 사회를 실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한 마음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