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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칼럼](10)비운(悲運)의 영웅(英雄) 이사(李斯)
[김성훈 칼럼](10)비운(悲運)의 영웅(英雄) 이사(李斯)
  • 뉴스N제주
  • 승인 2020.05.0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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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수필가
김성훈 수필가
김성훈 수필가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史記)의 이사열전(李斯列傳)을 보면 깊이 생각할 점들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비극적인 영웅의 최후에 아쉬움이 느껴진다.

진(秦) 시황(始皇)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기여하였고 후에 진(秦)의 승상을 지낸 이사(李斯)는 젊은 시절 초(楚)나라 상채(上蔡)라는 고을의 아전이었다.

그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살지만 어느 곳에 사는가에 따라서도 확연한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계기가 된 것은 뒷간의 쥐와 곳간의 쥐를 비교하면서 살펴본 것이었다.

이사가 젊은 시절에 상채(上蔡)라는 고을의 아전이었는데 관사(吏舍)의 변소에서 사는 쥐들이 사람이나 개의 기척을 느끼면 화들짝 놀라면서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사가 창고에 들어가 창고 안의 쥐를 보았는데 쌓아 놓은 곡식을 마음껏 먹으면서 사람이나 개의 기척을 느끼고도 별반 놀라지 않고 느긋하게 움직이며 살도 쪘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이사는 “사람의 현명함과 불초함이 비유하면 쥐와 같으니 자신이 처한 곳에 달려있구나(人之賢不肖譬如鼠矣,在所自處耳)”라고 탄식하였다.

그는 상채(上蔡)라는 고을의 아전을 그만두고 순경(荀卿)을 스승으로 모시며 제왕의 술을 배웠다.

이사는 그가 원하던 학문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느끼자 진나라로 가서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 되었고, 결국 진시황의 신하로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는 진시황을 설득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6국의 제후와 명사들에 대한 회유와 협박을 하며 서로를 이간시키는 정책을 펼쳐서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하였다.

마침내 이사는 승상(丞相)이 되었다. 그는 군현제를 시행하고,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정권의 안정을 위하여 제자백가의 사상을 억압하여야 한다고 진시황을 설득하여 분서갱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는 옛날의 가르침을 사사로이 배운 것을 옳다고 여기는 자들이 군주를 비난하므로 흑백을 구별하는 것은 군주만이 정할 수 있으나 사사로이 배운 것으로 서로 모여서 법과 가르침의 제도를 비난하니, 법령을 들어도 각각 그 개인의 학문으로 의논하며, 조정에 들어와서 마음으로 비난하고 조정에서 나오면 길거리에서 의논하며, 군주에게 비방하는 것을 명예로 삼으며 뜻을 달리하는 것을 고상함으로 여기며, 무리를 거느리고 비방을 조성할 것이므로 시(詩)와 서(書), 제자백가의 가르침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사는 최고의 부귀와 영광을 누렸으나 말로는 비참하였다. 환관 조고(趙高)와 권력다툼을 하다가 삼족이 멸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1894년 갑오동학을 일으켜서 처음에는 승전하였으나 갈수록 전세가 기울어 불리해졌다. 그의 심경을 담은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때를 만나니 천지도 내 편이더니(時來天地皆同力)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찌할 수가 없구나(運去英雄不自謨)
백성을 사랑한 올바른 일이 어찌 허물이겠는가(愛民正義我無失)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아주리(愛國丹心誰有知)

이사는 매우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말년을 보면 녹두장군의 시처럼 “때를 만나니 천지도 내 편이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찌할 수가 없구나”라는 시구에 공감하게 된다.

사기를 읽다가 이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니 서글픔이 아련하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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