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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문학상]4‧3평화재단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 당선작 선정
[4.3문학상]4‧3평화재단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 당선작 선정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0.04.28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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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부문 변희수의 ‘맑고 흰죽’, 논픽션 부문 김여정의 ‘그해 여름’
새로 신설된 논픽션 부문 올해 첫 수상자...소설부문 당선작 없어
시 부문 변희수의 ‘맑고 흰죽’, 논픽션 부문 김여정의 ‘그해 여름’
논픽션 부문 김여정 작가, 시 부문 변희수 시인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 당선작이 결정됐다.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은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연기됐던 제주4·3평화문학상 본심사를 진행하고 시‧논픽션 부문 당선작을 확정했다.

제주4·3평화문학상 운영위원회(위원장 현기영)는 지난 4월23일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 본심사위원회를 개최해 시 부문에 ‘맑고 흰죽’(변희수 작가, 1963년생, 경남 밀양 출생)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논픽션 부문은 응모편수가 적어 지난 1월31일 단심으로 심사를 진행해 ‘그해 여름’(김여정씨, 1974년생, 전남 영암 출생)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소설 부문에서는 아쉽게도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했다.

제주4‧3평화재단은 ‘4·3의 진실과 4·3진상규명 및 화해 과정에서 발현된 평화·인권·민주정신’을 주제로 시‧소설‧논픽션 세 장르에 대해 지난해 5월 13일부터 12월 13일까지 전국 공모를 진행한 바 있다. 공모 결과 국내‧외에서 220명이 응모했고 모두 1204편(시 1082편-102명, 소설 112편-108명, 논픽션 10편-10명)이 접수됐다.

제주4·3평화문학상 운영위원회는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심사지침>을 마련해 지난해 12월부터 예심과 본심사를 거쳐 응모작들을 심사했다.

시 부문 당선작 ‘맑고 흰죽’은 4‧3 당시 토벌대의 총탄에 턱을 잃어버린 채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진아영 할머니를 다루고 있다.

시 부문 심사위원들은 “‘죽’을 먹을 수밖에 없는 불편한 몸을 떠올리고, 그 불편함을 야기한 ‘죽고 죽이는’ 비극적 사건을 되새기면서, 고통스러운 기억을 쉽게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인식하에, 주어진 삶을 힘겹게 가누어나가는 한 인간의 애잔한 안간힘을 그려내고 있다”며 “음식을 통해 쓰디쓴 역사의 맛을 되새기는 절실함이 가슴을 울리게 한다”고 평가했다.

변희수 작가는 1963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2011년 영남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2013년 천강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시집 「아무것도 아닌, 모든」을 펴냈으며 현재 대구시교육청 창의융합교육원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지난 제7회 제주4‧3평화문학상에서 새로 신설된 논픽션 부문에서는 올해 들어 첫 수상자가 나왔다.

논픽션 당선작 ‘그해 여름’은 한국전쟁 당시 좌우익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부터 가난한 민중의 삶에 대한 증언을 다루는 작품이다. 주한미군사령부 바로 옆인 서울 용산구 보광동 빈민가에서 카페를 차린 필자가 동네 토박이 노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논픽션 부문 심사위원들은 “어디에도 보기 힘든 새로운 이야기를 채록했다는 점에서 참신했다”며 “취재원들의 생각과 감정을 함부로 추측하거나 상상하지 않고 본인들의 말을 통해 표현하는 논픽션의 기본원칙을 잘 지켰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추천했다”고 평가했다.

논픽션 부문 당선자 김여정씨는 영국에서 대학 졸업 후 국제인권단체 및 NGO활동가로 활동하다 용산에서 다문화 공동체 자립을 지원하고 있다. 실제 보광동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중 한국전쟁을 경험한 할머니들을 손님으로 만나게 돼 증언을 채록했다고 밝혔다.

제7회 제주4·3평화문학상에 이어 제8회에서도 소설 부문 당선작은 나오지 않았다.

소설 부문 심사위원들은 “소설의 미학은 언어와 서사, 예술성의 조화에 있다. 언어를 바탕으로 인물, 사건, 배경, 복선 등 구조적 장치가 서로에게 유기적으로 스며들 때 소설이라는 생명체가 비로소 숨을 쉰다”며 “우리는 이 생명체의 역동적인 숨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당선작을 내지 못하는 애석함이 유달리 컸던 것은 4·3평화문학상이 지닌 무게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제주4·3평화문학상은 제주특별자치도가 2012년 3월 제정해 제8회에 이르고 있으며, 2015년부터 제주4‧3평화재단이 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상금은 9000만원(소설 5000만원, 시 2000만원, 논픽션 2000만원)이다.

제주4·3평화문학상 제1회 수상작은 현택훈의 시 <곤을동>‧구소은의 소설 『검은 모래』, 제2회는 박은영의 시 <북촌리의 봄>‧양영수의 소설 『불타는 섬』, 제3회는 최은묵의 시 <무명천 할머니>‧장강명의 소설 『2세대 댓글부대』, 제4회는 김산의 시 <로프>‧정범종의 소설 『청학』, 제5회는 박용우의 시 <검정고무신>‧손원평의 소설 『1988년생』, 제6회는 정찬일의 시 <취우>‧김소윤의 소설 『정난주 마리아-잊혀진 꽃들』,제7회는 김병심의 시 <눈 살 때의 일>이다.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상식은 오는 5월 중 개최될 예정이다.

■ 당선자 사진 및 프로필

○ 시부문 당선자 – 변희수 작가
경남밀양 출생
영남일보(2011) 신춘문예
경향신문(2016) 신춘문예
천강문학상 수상 (2013)
2018년 아르코창작기금 선정
시집 『아무것도 아닌, 모든』 (문학나눔 도서선정)
현) 대구시교육청 창의융합교육원 강사

○ 논픽션 부문 당선자 – 김여정 작가
영국 브라이튼 소재 Sussex 대학 석사 졸업(2009)
동티모르 Peace Brigades International UN선거감시단(1999)
로터스월드 팀장(2010~2011)
다원이주민센터 사무국 대표(2013~2014)
현) 글로벌용산학교 사무국 대표
논문 「지정학 정치, 글로벌 거버넌스, 위기」(2010, IDS영국 국제개발학회) 등
책 『뚜제체(7인의 지구촌 마을 활동가 이야기)』, 『다크투어(아시아의 민간인학살)』

◆당선작 시부문 감상

맑고 흰죽*

불편해지면 죽을
끓입니다

식사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가볍게 훌훌 넘기고 싶다는 말
어제의 파도는 우물우물 삼켜도 된다는 그 말

그게 잘 안 돼요
부드럽게라는 말이 목에 걸려요

당분간 절식이나 금식
이상적인 처방이라는 건 알아요 미련이 생겨서
나는 죽을 먹습니다

맑고 흰죽을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돌아서서 코를 풀었죠
조금 묽어졌다는 뜻이지만
눈물은 짜니까
빨간 눈으론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
그런 날은 손바닥마다 노란 가시선인장꽃
울지 않은 척 했어요
얹혔을 거라고 수군거릴 때마다
이 고비는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생각에 걸려

어제도 오늘도 삼키죠 백번도 더 생각하죠
죽이고 죽이다 보면 또 다시 죽

이렇게 맑고 흰죽
목이 메여요 달랑 죽 한 그릇인데
눈이 부셔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몸속을 돌아다니는 물기가
어제의 죽이라 하겠지만
밤마다 복닥복닥 탕! 탕!
죽 끓이는 시간이 또 다시 찾아오고

죽은 조금만 쑤어도 넘치게 한 솥이에요
후회도 한 솥 미움도 한 솥이어서
나는 먹고 또 먹을 테죠
다행이다 싶지만

맑고 흰,
무명의 시간들

좀 서운해요 돌아서면 고프고
어떻게든 달래고 싶은데
받는 게 이것 밖에 없는 이 속이
내 속이 그렇다는 거죠 지금

*4.3 사건 피해자인 진아영 할머니는 턱과 이가 없어 평생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를 달고 살았다.

■시 부문 심사평

역사를 가정해서 말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하여 말한다면 어떨까? 가령 4 ‧ 3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제주 땅에 극도의 비극적인 역사는 출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통곡과 반목과 질시의 고통스런 아수라의 세계 역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역사는 이미 일어난 과거사실이므로 당연히 되돌릴 수 없다. 더불어 이념의 대립과 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희생양들의 아픔과 슬픔도 지워질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안쪽과 바깥쪽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수시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그것을 걷어내지 않으면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흔히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더는 참담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나간 4 ‧ 3의 역사를 똑바로 직시하고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거울로 삼아 마땅하다. 이번에 시행되는 <제8회 제주4 ‧ 3평화문학상>도 그런 취지에서 시행됨은 물론이다.

이번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면밀히 살펴보는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공통점으로 느낀 견해를 몇 가지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작품에 투영된 작가의 시선들이 대체적으로 4 ‧ 3을 피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 보는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4 ‧ 3의 현장성이나 리얼리티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4 ‧ 3의 역사성이나 정신적인 측면이 간과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또는 과잉된 수사의 현란한 사용 등으로 독자(심사위원)와의 소통을 어렵게 하는 작품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4 ‧ 3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소 왜곡된 시 쓰기가 이루어진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앞뒤가 맞지 않은 비유를 사용하거나 난해한 시 쓰기가 시적 진실을 가려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가운데 더욱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점은 응모작품들이 다루는 소재나 내용, 의미 등이 일정한 틀 안에 갇혀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어떤 한계성을 극복하는 노력과 작품의 생산이 요망된다. 이제 4 ‧ 3문학은 제주만의 4 ‧ 3, 또는 흔적에 국한된 4 ‧ 3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보다 세계사적인 범위로 의미를 확장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위에서 말한 내용 모두를 해결하거나 충족시키는 작품은 물론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은 시「맑고 흰 죽」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모았다. 이 작품은 4 ‧ 3사건의 피해자인 진아영 할머니에 대해 그리고 있다. 그녀는 턱과 이가 없어 평생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를 몸에 달고 살았다 한다.

이 작품은 ‘죽’을 통해 불편한 몸을 떠올리고, 그 불편함을 야기한 사건을 되새기면서, 그 사건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쉽게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하에서, 주어진 삶을 힘겹게 가누어나가는 한 인간의 애잔한 안간힘을 그려내고 있다.

죽을 먹을 수밖에 없지만, 언제나 ‘부드럽게’라는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삶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죽’은 ‘죽이고 죽이’는 비극적인 사태를 떠올리는 매개체이면서 언제나 목 메이게 하는 것으로 가장 절실한 삶의 영양소이다. 음식을 통해 쓰디쓴 역사의 맛을 되새기는 절실함이 가슴을 울리게 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이상국, 이하석, 김광렬
 

■논픽션 심사평

올해 논픽션 부문에 응모한 작품 중 투고의 기준을 통과해 심사 대상이 된 작품은 8편에 불과해 예심을 거치지 않고 본심만으로 진행했다. 응모 편수가 많지 않고 개별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의 평가가 일치하므로 전체 감평을 공개하여 투고자들이 새로운 작품을 쓰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흔히, 자기 인생을 소설로 쓰면 열권은 나올 거라는 노인들을 본다. 그러나 사연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전쟁도 가난도 겪지 않아 지극히 평탄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들도 내면으로 들어가면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하다. 문제는 그 사연들을 어떻게 그려내는가이다. 어떻게 독자를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감동 혹은 교훈을 줄 것이냐 하는 것이다. 두 응모작 <신촌 브루스>와 <되치 한판으로 날려버린>이 그런 문제의식에 직면한다.

<신촌 브루스>부터 보면, 어려서 부모를 잃어 교육받을 기회를 놓친 채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천신만고를 겪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롭다. 그러나 논픽션 부문에 걸맞지 않는 지나친 소설적 묘사가 오히려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이대로 사장시키기에는 아쉬운 줄거리인 만큼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어느 한 부문으로 특화시켜 보다 다듬어진 문장력으로 새로 쓴다면 좋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한다.

<되지기 한판으로 날려버린>은 1990년 전후에 벌어졌던 유명 식품회사의 노동조합운동을 매우 상세히 그렸다. 그러나 상투적인 표현과 묘사들로 신선함이 떨어지고, 단위사업장의 노동쟁의를 미시적으로 그리다보니 비슷한 상황과 주장이 번복되어 가독성도 떨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한국노동운동사에 귀중한 기록의 하나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제주4.3의 두 연대장>의 경우는 소재 자체가 흥미롭거니와 논픽션의 기본 원칙에 충실한 자료 수집과 취재 노력이 돋보인다. 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으로 제주 4.3사건 초기에 강경 진압을 주도하다가 부하의 총에 맞아죽은 박진경 대령과, 사건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반란군과의 협상을 주도했던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을 비교 분석하고, 직접 고인들의 고향과 유적지를 방문하여 현재의 상황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시와 소설, 심지어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이미 1차 가공된 타인의 창작품들을 너무 많이 인용하고 있어 스스로 객관성과 신뢰성을 훼손한다. 이런 부분들을 수정하고 보다 깊이 있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정리한다면 흥미롭고도 교훈이 담긴 탄탄한 글이 되리라 본다.

글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번 응모작들의 공통적인 한계를 찾으라면 실제 사실과 상상의 경계가 모호한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논픽션은 기본적으로 증언 혹은 기록에 의거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우는 것이 어느 정도 허용된다. 다만 그럴 경우 실제 기록과 작가의 생각을 구별해 주는 기술적인 친절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옥해의 여러 응모작이 그 경계를 지나치게 허물어 버릴 뿐 아니라, 작가 스스로 서문이나 본문에서 당당하게 불친절을 옹호하기까지 한다.

<마르지 않는 진실>도 그런 경우다. 지명, 인명, 사건개요가 모호한 채 작가의 주관적이고 단정적인 표현들로 이를 엮어냄으로서 창작 소설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잘 정리하여 제대로 된 소설로 재탄생시키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마부일기>의 경우는 서울 시내를 운행하는 한 택시기사의 시선으로 그린 21세기 한국 민주화운동의 이야기다. 2007년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박근혜 대통령 탄핵, 2017년 문제인 대통령 당선까지 벌어지는 일들을 일기 형태로 상세히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시대상을 후대에 남기는 의미가 크다고 본다.

아쉬운 것은 작가의 생각을 너무 날것으로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글은 결국 작가의 생각을 토대로 현실을 편집하는 주관성을 띌 수밖에 없지만, 독자에게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최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서술을 통해 독자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게 만드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정치문제에 대한 작가의 관점에 대부분 공감을 하면서도, 글 자체는 참고 자료의 가치에 머무르는 것 같아 퍽 아쉽다.

반면, <이래 안장 호꼼 들어보라>은 작가의 주관을 일체 개입시키지 않는다. 제주4.3을 직접 겪은 부친이 오랜 세월이 지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일기처럼 쓴 메모를 그대로 싣되 시간 흐름에 맞게 편집만 했다. 때문에 당시의 상황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생생하게 그려저 있어 기초 자료로서 가치가 높아 보인다.

크게 아쉬운 것은 제주도 방언까지 포함해 원본 기록에 너무 충실하다보니 독자로서는 기본적인 사건의 흐름을 이해하기도 쉽지가 않다는 점이다. 일기 자체가 상당수준의 문학적 완성도를 가졌다면 모를까, 기초 자료와 완성된 작품은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먼길>은 다른 여러 응모작들이 가진 문학적 완성도의 부족이라는 한계를 넘어선 수작으로 평가된다. 4.3 당시의 총상으로 턱을 잃고 평생을 고통 속에 외롭게 살아야 했던 실존인물 진아영 님의 이야기를 조용하고도 절절히 잘 그려냈다. 무엇보다도 감수성 뛰어난 문장력이 흡인력이 있어 잘 읽히고 또 감동을 준다.

그럼에도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하기 망설인 이유는 위에서 지적된 문제들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완전히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소설과 달리, 논픽션은 근거를 보여주거나 최소한 작가의 추측이라는 점을 특기해줄 필요가 있다. 이 경우처럼 주인공이 이미 작고해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면 논픽션이 아닌 소설로 그려내는 것도 고려해볼만 하며, <먼길>의 필자 정도의 문필력이면 훌륭한 작품을 쓰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이상의 작품들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일치했다. 또한 당선작으로 <그해 여름>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도 일말의 이견 없이 일치했다.

<그해 여름>은 주한미군사령부 바로 옆인 서울 용산구 보광동 빈민가에서 카페를 차린 필자가 동네의 토박이 노인들과 친해지면서 그들의 입을 통해 전쟁 때 벌어진 좌우익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부터 가난한 시절의 민중의 삶을 증언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이 작품은 우선 지금까지 정사나 비사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새로운 이야기를 채록했다는 점에서 매우 참신하다. 서술의 주체도 작가 본인으로 일관성이 있거니와, 취재원들의 생각과 감정을 함부로 추측하거나 상상하지 않고 본인들의 말을 통해 표현하는 논픽션의 기본원칙을 잘 지킨다는 점에서도 두 심사위원이 주저 없이 당선작으로 추천했다. 바람이 있다면 다수의 취재원 중에서 한두 명의 주인공을 선정해 보다 심도 깊에 인생을 추적하면 어떨까하는 것인데, 작가의 필력으로 보아 추후 작업도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무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픽션과 달리, 논픽션의 작가는 등장인물이나 역사적 사실 앞에 전지전능할 수가 없다. 증거와 증언의 노예가 될 필요는 없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이 거 사실이야, 작가의 상상이야?”하는 의심을 받는다면 논픽션으로서는 실패다. 논픽션과 픽션 중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느냐 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어떤 장르를 택하는, 필요한 덕목은 별로 다르지 않다. 내년의 제9회 투고작들을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안재성, 박영희

■소설 심사평

본심에 오른 소설 작품은 「17층, 천장이 높은 식당」(접수번호 047), 「나이스맨이 말했지」(접수번호 062), 「쇠와 이빨」(접수번호 082) 3편이다. 심사평은 본심위원 세 사람의 소견을 종합해 재구성했다.

소설과 역사는 이야기라는 공통의 뿌리를 갖고 있다. 역사가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라면, 소설은 허구를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다. 소설에서 허구란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를 뜻하지 않는다. 소설의 허구는 현실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볼 수 있게 하는 미학적 형식이자 내용이다. 소설이 역사를 품으면서 동시에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이런 허구의 힘 때문이다. 4·3의 아픈 상처를 문학작품으로 승화함과 아울러 4·3의 역사적 진실,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일깨우는 문학작품의 출현을 기대하며 만들어진 4·3평화문학상의 특별함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본심에 올라온 3편의 작품 모두 4·3평화문학상이 서 있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17층, 천장이 높은 식당>은 성폭력의 상처를 안고 홀로 어린 딸을 키우며 고단하게 살아가는 한 여성이 새로운 직장에서 겪는 사건을 통해 기업이라는 계급적 집단의 부조리한 상황을 그리고 있으나, 소설을 끌고 가는 일련의 사건들이 부자연스럽고 빈약하여 의미 있는 서사를 보여주지 못한다.

<나이스맨이 말했지>는 고독사 청소업체라는 흥미로운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고독사한 무연고자 사내가 남긴 녹음테이프 속 이야기를 매개로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소설이다. 하지만 녹음테이프 속 이야기의 밀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데다, 녹음테이프에 관심을 가지는 인물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들도 설득력이 약해 이야기 전체가 흩어진다.

<쇠와 이빨>은 누와르 영화의 대본을 읽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다. 젊은 엄마와 함께 비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소년이 엄마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조직의 보스를 만나 강남의 최고급 클럽을 관리하게 되면서부터 ‘공포영화의 법칙’을 닮은 한국사회의 피라미드 구조와 마주친다.

하지만 소설은 그런 문제적 모티브들을 구조화, 형상하지 못한 채 정제되지 않는 과장과 통속의 서사로 빠져들어 소설의 중심점을 놓쳐버린다.

소설의 깊이는 곧 언어와 서사의 깊이다. 언어를 바탕으로 인물, 사건, 배경, 복선 등 구조적 장치가 서로에게 유기적으로 스며들 때 소설이라는 생명체가 비로소 숨을 쉰다. 우리는 이 생명체의 역동적인 숨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당선작을 내지 못하는 애석함이 유달리 컸던 것은 4·3평화문학상이 지닌 무게 때문이다. 심사위원 고시홍, 임철우, 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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