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제목을 무엇에 비유하느냐에 따라 시의 수준 결정"
이어산 "제목을 무엇에 비유하느냐에 따라 시의 수준 결정"
  • 뉴스N제주
  • 승인 2020.03.13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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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칼럼]토요 시 창작 강좌(77)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시 창작 강좌(77)

□시가 되는 제목과 비시적 제목

우리가 제목을 붙일 때 흔히 하는 실수가 있다. 예를 들면 ‘벚꽃을 보며’라는 제목으로 벚꽃의 아름다움을 시에서 표현 했다면 제목으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이런 것이 제목 붙이기의 실수라는 것이다. 시에서는 A를 제목으로 써 놓고 그 A를 설명하면 ‘A는A다’는 말이 된다. 즉, ‘나는 나다’라는 말과 같으므로 제목으로서는 매우 경계해야할 것이다.

벚꽃이 제목이라면 내용은 ‘내가 뜨겁게 사랑했으되 떠나버린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고 하면 그것은 시로서 성공할 수 있다. 즉 A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A와는 다르지만 A와 유사한 B를 말해야 A는 시적으로 살아남는다. 이것이 바로 ‘비유’다.

‘비유가 없는 시는 죽은 시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시는 과학적 증명이 아니라 감성적, 정서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면서 ‘나는 그대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했다면 백과사전에 있는 내용을 옮긴 것과 같은 비시(非詩)다.

언어를 함부로 다루는 사람은 언어의 폭력배다.

시는 언어로 만들어진 예술 장르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기대어 울 한 사람 시가 떠났습니다’라고 했다면 사랑시로 승화 될 수 있다. 제목에 함몰되지 말고 제목A를 내용B로 전이시키는 방법으로 써야지만 비로소 시의 생명을 가질 수 있다.

A를 직접 말하지 않고 연관된 B를 동원하여 애매하게 말하는 방법이 시 짓기다. 애매하게 말하는 이유는 인생사 자체가 복잡하고 애매하기도 하지만 현대시에서 내용이 훤히 드러나면 뻔한 내용의 영화를 보듯 시적 재미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언어를 메타언어(meta language/언어에 대해 말하는 언어)라고 하는데, A를 무엇에 비유하느냐에 따라서 시의 수준이 결정 된다.

이것을 잘 못 이해하여 시인이 몇 번 정독을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 썼다면 그는 천재적으로 앞서가거나 시의 실력이 모자라서 난해하게 썼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시는 약간 애매해도 정독해 보면 그 뜻이 짐작되어서 무릎을 치게 되거나 재미있고 감흥이 있다.

봄을 맞는 스님들(노랑망태 버섯, 사진=김선미)
봄을 맞는 스님들(노랑망태 버섯, 사진=김선미)

시에 대한 밝은 눈을 가진 사람들은 제목만 봐도 그 시의 수준을 가늠한다. 그래서 시의 제목이 시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매우 중요하다. 다음의 제목들을 보자

1군
봄, 봄 마중, 봄의 산책, 백목련, 목련이 피었다네, 사회적 거리두기, 힘내라 대한민국, 학교가고 싶은 날이 되면 좋겠다. 행복, 일상, 고향친구

2군
두부가 가진 글자 하나, 봄을 퇴고하다. 복사꽃이 그랬단다, 발목증후군, 컵라면에 물을 부으며, 시인의 국밥집, 겹 그리고 그 틈, 신발 이야기, 담쟁이 숫총각, 장미단추, 태의 고향, 들풀의 잘못이 아니예요.

위 1군의 제목들은 내용이 짐작되거나 우리 눈에 익은 단어들이다. 이런 제목이 붙게 되면 시의 긴장감이 반감되어서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궁금증을 유발하기 힘들게 된다. 즉 '시의 낯설기'란 측면에서 제목부터 시적인 것에서 한 발 비껴서는 것이 된다.

반면 2군의 제목들은 대체적으로 새롭거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으므로 일단 성공적인 제목달기가 되었다. 무슨 내용인지 읽어 보고 싶은 동기를 1군의 제목들 보다는 좀 더 강하게 부여하고 있지 않은가?

'객관적이거나 평이한 것인가? 주관적이고 심미적인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시의 제목을 달 일이다.
유명 시인들의 시 제목을 한 번 보자.

울음이 타는 강(박재삼), 식칼론(조태일), 누더기 별(정호승),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황동규), 별을 팝니다(원구식), 1미터의 사랑(오탁번), 저 허공도 밥이다(신달자), 신발 한 짝(오세영), 다보탑을 줍다(유안진), 그 섬을 주고 싶다(강희근),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문효치), 칼의 기원(이기철)

조각가는 돌을 함부로 쪼지는 않는다. 깊은 생각과 마음에 그린 형상대로 혹은 설계에 따라서 조심조심하며 돌을 다듬는다.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우선 제목이 시가 되게 하고 내용에서도 언어를 조심해서 다뤄야한다. 될 수 있으면 거친 말, 된말, 비속어는 쓰지 말자. 언어를 함부로 다루는 사람은 언어의 폭력배다. 시는 언어로 만들어진 예술 장르이기에 그렇다.

조각가가 세심하게 돌을 다듬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올 수 없듯이 시를 쓰는 사람은 제목부터 섬세하게 결합하고 배치해야 그것들이 울림과 여운을 만들어 내고 시의 아름다움으로 태어나게 된다. 시인은 '하루'라는 시간의 그릇에 시어(詩語)를 주워 담는 습관부터 가져야한다.

그 그릇에 술을 담게 되면 하루는 '술잔'이 되지만 '행복'을 담으면 '행복바구니'가 된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널려 있는 '시어'를 담는 습관을 가지면 반드시 시인이 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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