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박여순 작가, 섬유전 ‘갈색일기’ 개인전
[전시]박여순 작가, 섬유전 ‘갈색일기’ 개인전
  • 이은솔 기자
  • 승인 2020.02.09 0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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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5 ~ 2. 28 심헌갤러리
박여순 선생 작품
박여순 선생 작품

박여순 선생이 33년동안 교직생활을 하면서 틈틈히 천연염색을 하고 천연염색한 천을 이용하여 스티치한 작품들을 교사생활을 마치면서 개인전을 갖게 돼 오는 15일부터 28일까지 심헌갤러리에서 전시된다.

박여순 선생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감, 쪽, 양파, 괴화, 등 주변의 재료들로 광목천 또는 실크천에 홀치기 기법과 침염으로 염색을 하여 제주의 오름과 동백이미지를 스티치로 제주의 소박함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며 “제주의 아픔을 대신해주는 동백꽃은 디지털 프린팅 기법으로 표현했으며, 동백꽃과 동백꽃을 이어가는 바늘땀은 내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서러운 한의 표현이고, 작품 속에 나비는 나의 희망이며 행복”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갈색일기’라는 일관된 주제로 매일 일기 쓰는 마음으로 나의 일상을 표현하였고 일기장의 낱장이 하나씩 넘겨지듯 나의 염색 이력과 나의 삶은 하나가 되어갔다”며 “일기장을 덮을 때 마다 성취 속에 느끼는 행복이라는 색깔을 더 입힐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또한 “제주의 풋감으로 염색을 하고 색이 서서히 갈색으로 변하여 완성 될 때의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며 “염색한 천에 새겨지는 바늘 한 땀 한 땀, 비뚤거리는 바늘땀은 나의 기쁨 한 땀, 서러움 한 땀, 후회 한 땀이 되어 나의 감정 선의 숨통이 되어줬다”고 강조했다.

박여순 작가는 “섬유공예라는 벗을 만나 그 동안 행복했다”며,“앞으로 남은 시간도 늘 곁에서 가까운 짝지로 삼아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지난 시절 신문에 기고했던 내용을 실어본다. 기고문을 통해 더욱더 박여순 작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박여순 선생이 33년동안 교직생활을 하면서 틈틈히 천연염색을 하고 천연염색한 천을 이용하여 스티치한 작품들을 교사생활을 마치면서 개인전을 갖게 돼 오는 15일부터 28일까지 심헌갤러리에서 전시된다.박여순 선생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감, 쪽, 양파, 괴화, 등 주변의 재료들로 광목천 또는 실크천에 홀치기 기법과 침염으로 염색을 하여 제주의 오름과 동백이미지를 스티치로 제주의 소박함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며 “제주의 아픔을 대신해주는 동백꽃은 디지털 프린팅 기법으로 표현했으며, 동백꽃과 동백꽃을 이어가는 바늘땀은 내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서러운 한의 표현이고, 작품 속에 나비는 나의 희망이며 행복”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갈색일기’라는 일관된 주제로 매일 일기 쓰는 마음으로 나의 일상을 표현하였고 일기장의 낱장이 하나씩 넘겨지듯 나의 염색 이력과 나의 삶은 하나가 되어갔다”며 “일기장을 덮을 때 마다 성취 속에 느끼는 행복이라는 색깔을 더 입힐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또한 “제주의 풋감으로 염색을 하고 색이 서서히 갈색으로 변하여 완성 될 때의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며 “염색한 천에 새겨지는 바늘 한 땀 한 땀, 비뚤거리는 바늘땀은 나의 기쁨 한 땀, 서러움 한 땀, 후회 한 땀이 되어 나의 감정 선의 숨통이 되어줬다”고 강조했다.박여순 작가는 “섬유공예라는 벗을 만나 그 동안 행복했다”며,“앞으로 남은 시간도 늘 곁에서 가까운 짝지로 삼아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다음은 지난 시절 신문에 기고했던 내용을 실어본다. 기고문을 통해 더욱더 박여순 작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나의 고향은 제주의 작은 시골마을 애월읍 고내봉 앞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상가리’이다.지금, 제주는 국제적 도시가 되어 버려서 그런지 시(市)나 읍(邑) 지역에 관계없이 어디든지 나온 땅(부동산 매물)만 있으면 서로 사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너무 많아 ‘삶의 싸움터’가 되어버렸지만 내가 어렸을 적 55여 년 전만 해도 중산간 마을이라 하면 아주 시골이었고 정말 한적한 마을이었다.그러나 지금 내 고향은 변해도 너무나 많이 변해 버렸다. 오로지 마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었던 길에는 2차선, 3차선 자동차도로가 뻗어있고, 우물이 있어서 물허벅을 짊어지고 물을 뜨러 다녔던 우물터 다니던 길에도 아스팔트가 깔려있다. 소를 몰고 저수지에 가서 물을 먹이고, 풀을 뜯어 먹이게 했던 곳은 매립이 되어 식당이 들어서 있고, 매일 흙을 밝고 다녔던 좁은 길에도 이제는 포장이 되어 있어서 가끔씩 이곳을 오갈 때면 그 옛날 풍경의 그리움에 사무쳐서 마음이 먹먹해지곤 한다.언젠가 남편과 함께 그 고내봉을 오르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초등학교 6년 동안 고내봉을 오르내릴 적에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너무 낮아져 버린 것 같다. 새로운 길이 생기면서 높게 올라와서 그런 것인가?” 실제로 옛날 멀고 높기만 하던 그 고내봉 둘레길이 짧기만 하고, 내가 살았던 예쁜 초가집은 2층집으로 변모해 있고, 옆집 삼촌이 살았던 또 다른 초가집은 종교시설로 변해있어 바뀐 내 고향 옛 풍경이 자꾸 그립기만 하다. 하기야, 벌써 그 고향을 떠난 지도 40여년이 지났으니… 옛 마을이 변한 것은 당연한 것임을 새삼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그 일 이후 어느 날, 나의 바쁜 생활의 반복 속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며 그 지속적인 삶에 지칠 때 마다 잃어버린 우리 옛 것을 찾아보려고, 무언가 변화의 길을 걷고 싶어서 주변을 기웃 거릴 적에 고향에서 보고 누렸던 그 옛날 제주의 생활염색이 떠올랐다. 이로 인해 당연히 천연염색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시절 매우 흔하던 제주의 전통적 감염색을 시작하게 되었다.그래서 어느 뜨거운 여름날, 같은데 관심을 가진 동료, 교수 등과 함께 큰 감나무를 찾아내서 우리가 긴 막대기로 감을 따고, 딴 감을 으깨어 감염액을 만들어서 하얀 천에다 감염색을 한 후 햇빛이 강한 잔디밭 위에 물들인 것들을 나란히 널어 두었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며 물들인 천이 갈색으로 변해갈 때면 나의 지치고 피곤함도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또한 감으로 염색한 천으로 옷이나 이불, 카펫, 커튼… 등등 많은 일상 생활용품을 만들어 보면서, 어느새 이미 바쁜 내 삶 속에서도 감염색이 중요한 생활이 되어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친정어머니께 내가 감염색을 한다고 하니 하시는 말씀이 “그 염색 잘햄쩌 감물드령 아라아방 갈중이 만들엉 벌초 갈 때 입엉가게 허라(염색 시작 잘했다 감염색 잘해서 아라아빠 산소에 벌초 갈 때 입고가게 해라)”, “아니우다 우리 서방 멋진 양복도 해주곡 내가 입을 원피스도 만들엉 입을꺼 마씨(아닙니다 내 남편 멋진 양복도 만들어드리고 내가 입을 원피스도 만들 것입니다)”라고 했더니 무슨 소리냐고 감염색한 천은 당연히 노동복인 갈중이만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 어머니, 실제로 어머니 시절에 갈옷은 당연히 노동복으로만 입는 일상복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그래서 어머니에게 옛날에는 어떻게 감염색을 했는지도 여쭈어보게 되었다. 하시는 말씀이 7월 말쯤 풋감을 따서 절구통에 넣고, 뽀아서(찧다) 감씨가 보이면 먹을 수 있는 것은 간식으로 먹고, 나머지 감물에다 천을 물들인 후 감껍질만 그냥 마당에 털어내고, 물들인 천을 초가지붕 위에 그냥 널어둔다고 했다. 밤이 되어도 그것을 걷지 않고 그냥 새벽이슬을 맞게 하여서 천이 촉촉해지면 햇빛에 말리는데 그 습기로 인해 한여름 햇볕에 점점 갈색으로 바뀌길 반복하게 한다고 했다. 그러길 10여일을 그냥 초가지붕에 널어두었다고 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넓고 무거운 돌을 지붕에 올려서 눌려 놓고 하여서, 그 염색된 천으로는 아버지 등 가족의 옷을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마당에 털어낸 감껍질이나 감씨들, 즉 그 찌꺼기는 까마귀 등 날짐승들의 좋은 간식이 되었다고 한다.제주 ‘풋감’은 육지 등 다른 지역의 감보다 ‘타닌’ 성분이 많고 색소가 풍부한 토종감이다. 이러한 염색의 원리도 그 풋감이 지닌 타닌 성분이 섬유와 결합하여 응고되는 과정에서 섬유질을 빳빳하게 만드는데, 그것을 햇빛에 노출시켜 말리는 과정을 10여회 정도 반복하면 산화되고 중합되면서 짙은 갈색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게 염색된 천으로 옷을 지으면 ‘갈옷’이 되고, 그 갈옷을 제주에서는 ‘갈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따라서 제주 갈옷은 염색 후 그 내구력이 2배 정도 강해지며, 세탁 후에도 풀을 먹이지 않아도 풀을 먹인 듯 빳빳하며, 통기성이 좋고, 열전도율이 낮아 여름에 시원하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 이슬 맺힌 밭에서 노동을 하거나 바닷물에 젖게 되는 어부들의 일복으로도 적합했다. 뿐만 아니라 감염색 자체가 천연 방부제가 되어서, 물이나 땀이 묻어도 썩지 않고, 땀 냄새도 나지 않으며, 먼지도 금세 떨어지고, 목초를 베는 작업 시에는 천연 코팅이 되어 있어서 목초에 찔리지 않아 노동복으로도 즐겨 입었다. 감물염색은 옛날에는 주로 무명(국산 면직물)을 이용하였으나, 1940년대부터 광목(외국산 면직물)이 시판되면서 주로 광목을 많이 사용하였다. 기존에 입다가 지워지지 않는 오염물이 묻었나, 입다가 싫증이 나면, 새로운 변화를 주어서 원하는 옷을 해 입거나 가방, 신발, 손수건 등 천연소재로 쓰이는 등 감염색은 실제로 염색이 아주 잘되고 실용적으로 일상에 많이 활용되었다.현재 우리 어머니 나이가 95세다. 어머니가 지금도 가끔 과거에 살았던 옛날이야기를 하실 때면 항상 그게 가장 전통적이었던 우리의 방법이었다고 말씀하신다. 나도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우리의 옛날 무늬를 형성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여 본다. 그리고 가끔은, 아니 자주 과거의 삶이 그리울 때가 있다. 너무나도 변해 버린 내 고향, 너무도 관광객 위주로 되어버린 내 고향이 살짝 슬프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지금은 그런 초가집을 보려면 민속촌에 가야만 볼 수가 있으며, 어머니 시대에는 초가지붕 볏짚 위에다 염색천을 널어놓았다면 지금은 잔디밭에서 염색천을 널어놓거나, 또는 빨랫줄에 널어두고 말린다. 햇볕을 많이 받는 쪽이 더 진한 갈색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날 전통, 오랜 세월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살아온 그 지혜를 알고 싶고, 구현해 보고 싶다. 이를 현재의 염색방법과 연계해 가면서도, 우리만의 고유하면서도 독창적인, 즉 자기만의 스타일에 맞는 염색방법을 터득하고자 노력해보려 한다.박여순 제주섬유예술가회 부회장의 작품
박여순 작가 작품

나의 고향은 제주의 작은 시골마을 애월읍 고내봉 앞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상가리’이다.

지금, 제주는 국제적 도시가 되어 버려서 그런지 시(市)나 읍(邑) 지역에 관계없이 어디든지 나온 땅(부동산 매물)만 있으면 서로 사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너무 많아 ‘삶의 싸움터’가 되어버렸지만 내가 어렸을 적 55여 년 전만 해도 중산간 마을이라 하면 아주 시골이었고 정말 한적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고향은 변해도 너무나 많이 변해 버렸다. 오로지 마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었던 길에는 2차선, 3차선 자동차도로가 뻗어있고, 우물이 있어서 물허벅을 짊어지고 물을 뜨러 다녔던 우물터 다니던 길에도 아스팔트가 깔려있다.

소를 몰고 저수지에 가서 물을 먹이고, 풀을 뜯어 먹이게 했던 곳은 매립이 되어 식당이 들어서 있고, 매일 흙을 밝고 다녔던 좁은 길에도 이제는 포장이 되어 있어서 가끔씩 이곳을 오갈 때면 그 옛날 풍경의 그리움에 사무쳐서 마음이 먹먹해지곤 한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그 고내봉을 오르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초등학교 6년 동안 고내봉을 오르내릴 적에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너무 낮아져 버린 것 같다.

새로운 길이 생기면서 높게 올라와서 그런 것인가?” 실제로 옛날 멀고 높기만 하던 그 고내봉 둘레길이 짧기만 하고, 내가 살았던 예쁜 초가집은 2층집으로 변모해 있고, 옆집 삼촌이 살았던 또 다른 초가집은 종교시설로 변해있어 바뀐 내 고향 옛 풍경이 자꾸 그립기만 하다. 하기야, 벌써 그 고향을 떠난 지도 40여년이 지났으니… 옛 마을이 변한 것은 당연한 것임을 새삼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그 일 이후 어느 날, 나의 바쁜 생활의 반복 속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며 그 지속적인 삶에 지칠 때 마다 잃어버린 우리 옛 것을 찾아보려고, 무언가 변화의 길을 걷고 싶어서 주변을 기웃 거릴 적에 고향에서 보고 누렸던 그 옛날 제주의 생활염색이 떠올랐다. 이로 인해 당연히 천연염색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시절 매우 흔하던 제주의 전통적 감염색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뜨거운 여름날, 같은데 관심을 가진 동료, 교수 등과 함께 큰 감나무를 찾아내서 우리가 긴 막대기로 감을 따고, 딴 감을 으깨어 감염액을 만들어서 하얀 천에다 감염색을 한 후 햇빛이 강한 잔디밭 위에 물들인 것들을 나란히 널어 두었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며 물들인 천이 갈색으로 변해갈 때면 나의 지치고 피곤함도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또한 감으로 염색한 천으로 옷이나 이불, 카펫, 커튼… 등등 많은 일상 생활용품을 만들어 보면서, 어느새 이미 바쁜 내 삶 속에서도 감염색이 중요한 생활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정어머니께 내가 감염색을 한다고 하니 하시는 말씀이 “그 염색 잘햄쩌 감물드령 아라아방 갈중이 만들엉 벌초 갈 때 입엉가게 허라(염색 시작 잘했다 감염색 잘해서 아라아빠 산소에 벌초 갈 때 입고가게 해라)”, “아니우다 우리 서방 멋진 양복도 해주곡 내가 입을 원피스도 만들엉 입을꺼 마씨(아닙니다 내 남편 멋진 양복도 만들어드리고 내가 입을 원피스도 만들 것입니다)”라고 했더니 무슨 소리냐고 감염색한 천은 당연히 노동복인 갈중이만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 어머니, 실제로 어머니 시절에 갈옷은 당연히 노동복으로만 입는 일상복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박여순 선생이 33년동안 교직생활을 하면서 틈틈히 천연염색을 하고 천연염색한 천을 이용하여 스티치한 작품들을 교사생활을 마치면서 개인전을 갖게 돼 오는 15일부터 28일까지 심헌갤러리에서 전시된다.박여순 선생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감, 쪽, 양파, 괴화, 등 주변의 재료들로 광목천 또는 실크천에 홀치기 기법과 침염으로 염색을 하여 제주의 오름과 동백이미지를 스티치로 제주의 소박함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며 “제주의 아픔을 대신해주는 동백꽃은 디지털 프린팅 기법으로 표현했으며, 동백꽃과 동백꽃을 이어가는 바늘땀은 내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서러운 한의 표현이고, 작품 속에 나비는 나의 희망이며 행복”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갈색일기’라는 일관된 주제로 매일 일기 쓰는 마음으로 나의 일상을 표현하였고 일기장의 낱장이 하나씩 넘겨지듯 나의 염색 이력과 나의 삶은 하나가 되어갔다”며 “일기장을 덮을 때 마다 성취 속에 느끼는 행복이라는 색깔을 더 입힐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또한 “제주의 풋감으로 염색을 하고 색이 서서히 갈색으로 변하여 완성 될 때의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며 “염색한 천에 새겨지는 바늘 한 땀 한 땀, 비뚤거리는 바늘땀은 나의 기쁨 한 땀, 서러움 한 땀, 후회 한 땀이 되어 나의 감정 선의 숨통이 되어줬다”고 강조했다.박여순 작가는 “섬유공예라는 벗을 만나 그 동안 행복했다”며,“앞으로 남은 시간도 늘 곁에서 가까운 짝지로 삼아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다음은 지난 시절 신문에 기고했던 내용을 실어본다. 기고문을 통해 더욱더 박여순 작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나의 고향은 제주의 작은 시골마을 애월읍 고내봉 앞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상가리’이다.지금, 제주는 국제적 도시가 되어 버려서 그런지 시(市)나 읍(邑) 지역에 관계없이 어디든지 나온 땅(부동산 매물)만 있으면 서로 사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너무 많아 ‘삶의 싸움터’가 되어버렸지만 내가 어렸을 적 55여 년 전만 해도 중산간 마을이라 하면 아주 시골이었고 정말 한적한 마을이었다.그러나 지금 내 고향은 변해도 너무나 많이 변해 버렸다. 오로지 마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었던 길에는 2차선, 3차선 자동차도로가 뻗어있고, 우물이 있어서 물허벅을 짊어지고 물을 뜨러 다녔던 우물터 다니던 길에도 아스팔트가 깔려있다. 소를 몰고 저수지에 가서 물을 먹이고, 풀을 뜯어 먹이게 했던 곳은 매립이 되어 식당이 들어서 있고, 매일 흙을 밝고 다녔던 좁은 길에도 이제는 포장이 되어 있어서 가끔씩 이곳을 오갈 때면 그 옛날 풍경의 그리움에 사무쳐서 마음이 먹먹해지곤 한다.언젠가 남편과 함께 그 고내봉을 오르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초등학교 6년 동안 고내봉을 오르내릴 적에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너무 낮아져 버린 것 같다. 새로운 길이 생기면서 높게 올라와서 그런 것인가?” 실제로 옛날 멀고 높기만 하던 그 고내봉 둘레길이 짧기만 하고, 내가 살았던 예쁜 초가집은 2층집으로 변모해 있고, 옆집 삼촌이 살았던 또 다른 초가집은 종교시설로 변해있어 바뀐 내 고향 옛 풍경이 자꾸 그립기만 하다. 하기야, 벌써 그 고향을 떠난 지도 40여년이 지났으니… 옛 마을이 변한 것은 당연한 것임을 새삼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그 일 이후 어느 날, 나의 바쁜 생활의 반복 속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며 그 지속적인 삶에 지칠 때 마다 잃어버린 우리 옛 것을 찾아보려고, 무언가 변화의 길을 걷고 싶어서 주변을 기웃 거릴 적에 고향에서 보고 누렸던 그 옛날 제주의 생활염색이 떠올랐다. 이로 인해 당연히 천연염색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시절 매우 흔하던 제주의 전통적 감염색을 시작하게 되었다.그래서 어느 뜨거운 여름날, 같은데 관심을 가진 동료, 교수 등과 함께 큰 감나무를 찾아내서 우리가 긴 막대기로 감을 따고, 딴 감을 으깨어 감염액을 만들어서 하얀 천에다 감염색을 한 후 햇빛이 강한 잔디밭 위에 물들인 것들을 나란히 널어 두었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며 물들인 천이 갈색으로 변해갈 때면 나의 지치고 피곤함도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또한 감으로 염색한 천으로 옷이나 이불, 카펫, 커튼… 등등 많은 일상 생활용품을 만들어 보면서, 어느새 이미 바쁜 내 삶 속에서도 감염색이 중요한 생활이 되어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친정어머니께 내가 감염색을 한다고 하니 하시는 말씀이 “그 염색 잘햄쩌 감물드령 아라아방 갈중이 만들엉 벌초 갈 때 입엉가게 허라(염색 시작 잘했다 감염색 잘해서 아라아빠 산소에 벌초 갈 때 입고가게 해라)”, “아니우다 우리 서방 멋진 양복도 해주곡 내가 입을 원피스도 만들엉 입을꺼 마씨(아닙니다 내 남편 멋진 양복도 만들어드리고 내가 입을 원피스도 만들 것입니다)”라고 했더니 무슨 소리냐고 감염색한 천은 당연히 노동복인 갈중이만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 어머니, 실제로 어머니 시절에 갈옷은 당연히 노동복으로만 입는 일상복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그래서 어머니에게 옛날에는 어떻게 감염색을 했는지도 여쭈어보게 되었다. 하시는 말씀이 7월 말쯤 풋감을 따서 절구통에 넣고, 뽀아서(찧다) 감씨가 보이면 먹을 수 있는 것은 간식으로 먹고, 나머지 감물에다 천을 물들인 후 감껍질만 그냥 마당에 털어내고, 물들인 천을 초가지붕 위에 그냥 널어둔다고 했다. 밤이 되어도 그것을 걷지 않고 그냥 새벽이슬을 맞게 하여서 천이 촉촉해지면 햇빛에 말리는데 그 습기로 인해 한여름 햇볕에 점점 갈색으로 바뀌길 반복하게 한다고 했다. 그러길 10여일을 그냥 초가지붕에 널어두었다고 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넓고 무거운 돌을 지붕에 올려서 눌려 놓고 하여서, 그 염색된 천으로는 아버지 등 가족의 옷을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마당에 털어낸 감껍질이나 감씨들, 즉 그 찌꺼기는 까마귀 등 날짐승들의 좋은 간식이 되었다고 한다.제주 ‘풋감’은 육지 등 다른 지역의 감보다 ‘타닌’ 성분이 많고 색소가 풍부한 토종감이다. 이러한 염색의 원리도 그 풋감이 지닌 타닌 성분이 섬유와 결합하여 응고되는 과정에서 섬유질을 빳빳하게 만드는데, 그것을 햇빛에 노출시켜 말리는 과정을 10여회 정도 반복하면 산화되고 중합되면서 짙은 갈색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게 염색된 천으로 옷을 지으면 ‘갈옷’이 되고, 그 갈옷을 제주에서는 ‘갈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따라서 제주 갈옷은 염색 후 그 내구력이 2배 정도 강해지며, 세탁 후에도 풀을 먹이지 않아도 풀을 먹인 듯 빳빳하며, 통기성이 좋고, 열전도율이 낮아 여름에 시원하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 이슬 맺힌 밭에서 노동을 하거나 바닷물에 젖게 되는 어부들의 일복으로도 적합했다. 뿐만 아니라 감염색 자체가 천연 방부제가 되어서, 물이나 땀이 묻어도 썩지 않고, 땀 냄새도 나지 않으며, 먼지도 금세 떨어지고, 목초를 베는 작업 시에는 천연 코팅이 되어 있어서 목초에 찔리지 않아 노동복으로도 즐겨 입었다. 감물염색은 옛날에는 주로 무명(국산 면직물)을 이용하였으나, 1940년대부터 광목(외국산 면직물)이 시판되면서 주로 광목을 많이 사용하였다. 기존에 입다가 지워지지 않는 오염물이 묻었나, 입다가 싫증이 나면, 새로운 변화를 주어서 원하는 옷을 해 입거나 가방, 신발, 손수건 등 천연소재로 쓰이는 등 감염색은 실제로 염색이 아주 잘되고 실용적으로 일상에 많이 활용되었다.현재 우리 어머니 나이가 95세다. 어머니가 지금도 가끔 과거에 살았던 옛날이야기를 하실 때면 항상 그게 가장 전통적이었던 우리의 방법이었다고 말씀하신다. 나도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우리의 옛날 무늬를 형성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여 본다. 그리고 가끔은, 아니 자주 과거의 삶이 그리울 때가 있다. 너무나도 변해 버린 내 고향, 너무도 관광객 위주로 되어버린 내 고향이 살짝 슬프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지금은 그런 초가집을 보려면 민속촌에 가야만 볼 수가 있으며, 어머니 시대에는 초가지붕 볏짚 위에다 염색천을 널어놓았다면 지금은 잔디밭에서 염색천을 널어놓거나, 또는 빨랫줄에 널어두고 말린다. 햇볕을 많이 받는 쪽이 더 진한 갈색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날 전통, 오랜 세월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살아온 그 지혜를 알고 싶고, 구현해 보고 싶다. 이를 현재의 염색방법과 연계해 가면서도, 우리만의 고유하면서도 독창적인, 즉 자기만의 스타일에 맞는 염색방법을 터득하고자 노력해보려 한다.박여순 제주섬유예술가회 부회장의 작품
박여순 작가 사진

그래서 어머니에게 옛날에는 어떻게 감염색을 했는지도 여쭈어보게 되었다. 하시는 말씀이 7월 말쯤 풋감을 따서 절구통에 넣고, 뽀아서(찧다) 감씨가 보이면 먹을 수 있는 것은 간식으로 먹고, 나머지 감물에다 천을 물들인 후 감껍질만 그냥 마당에 털어내고, 물들인 천을 초가지붕 위에 그냥 널어둔다고 했다.

밤이 되어도 그것을 걷지 않고 그냥 새벽이슬을 맞게 하여서 천이 촉촉해지면 햇빛에 말리는데 그 습기로 인해 한여름 햇볕에 점점 갈색으로 바뀌길 반복하게 한다고 했다.

그러길 10여일을 그냥 초가지붕에 널어두었다고 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넓고 무거운 돌을 지붕에 올려서 눌려 놓고 하여서, 그 염색된 천으로는 아버지 등 가족의 옷을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마당에 털어낸 감껍질이나 감씨들, 즉 그 찌꺼기는 까마귀 등 날짐승들의 좋은 간식이 되었다고 한다.

제주 ‘풋감’은 육지 등 다른 지역의 감보다 ‘타닌’ 성분이 많고 색소가 풍부한 토종감이다. 이러한 염색의 원리도 그 풋감이 지닌 타닌 성분이 섬유와 결합하여 응고되는 과정에서 섬유질을 빳빳하게 만드는데, 그것을 햇빛에 노출시켜 말리는 과정을 10여회 정도 반복하면 산화되고 중합되면서 짙은 갈색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게 염색된 천으로 옷을 지으면 ‘갈옷’이 되고, 그 갈옷을 제주에서는 ‘갈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따라서 제주 갈옷은 염색 후 그 내구력이 2배 정도 강해지며, 세탁 후에도 풀을 먹이지 않아도 풀을 먹인 듯 빳빳하며, 통기성이 좋고, 열전도율이 낮아 여름에 시원하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 이슬 맺힌 밭에서 노동을 하거나 바닷물에 젖게 되는 어부들의 일복으로도 적합했다.

뿐만 아니라 감염색 자체가 천연 방부제가 되어서, 물이나 땀이 묻어도 썩지 않고, 땀 냄새도 나지 않으며, 먼지도 금세 떨어지고, 목초를 베는 작업 시에는 천연 코팅이 되어 있어서 목초에 찔리지 않아 노동복으로도 즐겨 입었다.

감물염색은 옛날에는 주로 무명(국산 면직물)을 이용하였으나, 1940년대부터 광목(외국산 면직물)이 시판되면서 주로 광목을 많이 사용하였다. 기존에 입다가 지워지지 않는 오염물이 묻었나, 입다가 싫증이 나면, 새로운 변화를 주어서 원하는 옷을 해 입거나 가방, 신발, 손수건 등 천연소재로 쓰이는 등 감염색은 실제로 염색이 아주 잘되고 실용적으로 일상에 많이 활용되었다.

현재 우리 어머니 나이가 95세다. 어머니가 지금도 가끔 과거에 살았던 옛날이야기를 하실 때면 항상 그게 가장 전통적이었던 우리의 방법이었다고 말씀하신다. 나도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우리의 옛날 무늬를 형성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여 본다.

그리고 가끔은, 아니 자주 과거의 삶이 그리울 때가 있다. 너무나도 변해 버린 내 고향, 너무도 관광객 위주로 되어버린 내 고향이 살짝 슬프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그런 초가집을 보려면 민속촌에 가야만 볼 수가 있으며, 어머니 시대에는 초가지붕 볏짚 위에다 염색천을 널어놓았다면 지금은 잔디밭에서 염색천을 널어놓거나, 또는 빨랫줄에 널어두고 말린다. 햇볕을 많이 받는 쪽이 더 진한 갈색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날 전통, 오랜 세월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살아온 그 지혜를 알고 싶고, 구현해 보고 싶다. 이를 현재의 염색방법과 연계해 가면서도, 우리만의 고유하면서도 독창적인, 즉 자기만의 스타일에 맞는 염색방법을 터득하고자 노력해보려 한다.

박여순 제주섬유예술가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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