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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제언..."사물의 뼈대 이미지화하라"
이어산,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제언..."사물의 뼈대 이미지화하라"
  • 뉴스N제주
  • 승인 2020.02.08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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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칼럼(72)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詩 창작 강좌(72)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제언

사진=한라산 백설나무(이어산)
사진=한라산 백설나무(이어산)

시를 쓰다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일이 가끔 있다.

내가 쓴 시나 유명 시인이 썼다는 그 시와의 차이가 별로 없어 보이는데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유명 시인의 시는 잘 썼다고 하면서 나의 시에는 고칠 데가 많다는 지적을 한다.

내가 볼 때 나의 시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며 그들의 시와 어떤 것이 다른지 진짜 궁금할 때가 있다.

아마추어 시인의 시가 잘 안 되는 결정적 이유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시에 뼈가 없는 경우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에 뼈가 없다니?!' 그렇다. 뼈는 없고 말이 많다. 말이 많다는 것은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까봐 덧붙이는 친절한 설명이다.

설명하려는 버릇을 과감하게 버리지 않으면 당신의 시는 시의 언저리를 맴돌다 본질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주저앉게 될지도 모른다. 산문의 미덕은 친절하게 설명하는 가지가 무성한 나무라면, 시는 적게 말하면서 지극히 필요한 가지만 남기고 잔가지를 다 잘라내어 뼈대만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나무이다.

다 설명되지 않은 그것을 통하여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학 장르가 시(詩) 이기에 그렇다. 가지가 많을수록 지탱하는 힘이 약해지는 것이 시의 특징이다. 시가 짧든, 길든 간에 튼튼한 줄거리, 즉 뼈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잘 쓴 시와 못 쓴 시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의 저자 이의수(남성문화연구소장)의 사안론(四眼論)에 공감했던 것은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시안론(詩眼論)과 비슷한 개념이기에 오늘은 나의 관점에서 소개한다.

육안(肉眼)으로 보고 생각했던 것, 즉,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보통의 현상을 보는 눈을 뇌안(腦眼)이라고 한다. 뇌안으로 설명해 버리면 재미없는 자기현시(自己顯示/자기의 존재를 일부러 드러내는 일) 글이 되기 쉽다. 감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법한 내용을 시로 표현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런 글은 '껍데기 글', 또는 흘러간 유행가처럼 식상한 글이 되기 쉽다.

다시 말하거니와 시는 본질적으로 새롭거나 신선한 해석이다. 그 본질의 신선한 이야기가 바로 <시의 뼈대>이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적게 말하되 적확(的確accuracy )한 시어로 말하고 직접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닌 뚜렷한 이미지가 떠오르도록 하는 것이 튼튼한 뼈대를 세우는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보통 속에서 특수를 찾고 특수한 것을 묶어서 뼈대를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시의 언어가 특별한 천상의 언어는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보통 사용하는 구어(口語)이다.

그 단어들도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색채가 별로 없는 평범한 것이지만 그것을 조합하여 입체화 시키는 작업, 즉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 하는 것이 시 쓰기라는 말이다. 말은 그럴듯한데 그게 쉽게 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렇다. 쉽게 되면 사천만 국민이 시인이 될 것이다.

노력 없이 시인이 될 수는 없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란 말이 있듯 한 번 시인으로 등단하면 시를 잘 쓰든 못 쓰든, 일류이든 삼류이든 ‘시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데 시인의 자질(資質)은 논외로 하더라도 아무나 시인의 이름을 갖게 되면 되겠는가?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익숙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보고 말하는 능력, 비틀어서 보고, 거꾸로 보고 새롭게 해석한 것을 나만의 시각(나만의 진술 넣기)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길러야 진정한 의미의 시인이 될 수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시인은 없다. 깊은 고뇌와 시간의 투자 없이 쉽게 시가 쓰인다면 얼마나 좋으랴 마는 시를 쓰는 일은 산고의 고통을 감내 해야 한다는 말이 실감 날 때가 있다.

그만큼 땀과 정성과 시간과 눈물까지도 쏟아 부어야만 하는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노력 없이 시인이 되려는 것은 임신한지 한두 달 만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튼튼한 아이를 낳겠다는 욕심과도 같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보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 한다. 본성을 보는 눈을 심안(心眼), 또는 심미안(審美眼)이라고 하고 그 이상의 것을 보는 눈을 영안(靈眼), 즉 영혼 속에 간직하고 있는 눈이라고 한다.

이 이론은 일전에 소개했던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주창한 개념인 상징계(현상)와 실재계(본성)의 이론과 같다. '육안과 뇌안'은 상징계(像徵界), 즉 현상이라는 껍데기를 보는 것이고 ‘심안(심미안)’과 ‘영안’은 실재계(實在界), 즉 껍데기 안의 본질을 보는 것이라고 했을 때, 시의 <뼈대>란 결국 실재계의 현현(實在界의 顯現)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시를 잘 쓰는 사람은 사물의 뼈를 이미지화 시키는데 반하여 초보자는 사물의 현상(잔 가지)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다.

현대시학에서는 특별한 시어(詩語)의 효용가치 보다는 보통의 언어를 조탁(彫琢)한 ‘시의 언어’에 눈길을 준다. 화려한 개개의 시어를 찾던 시대는 지났다. 현상 뒤의 숨어 있는 본질을 주재료로 하고 시인의 생각 끼워넣기(진술)로 신선한 맛을 내어서 적당한 크기의 쟁반에 담아 독자의 식탁에 올려놓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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