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2024-03-29 19:09 (금)
>
이어산, "시를 발표하는것은 독자에게 시집가는 것"
이어산, "시를 발표하는것은 독자에게 시집가는 것"
  • 뉴스N제주
  • 승인 2020.01.31 21:37
  • 댓글 1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어산칼럼(71)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시 창작 강좌(71)

□ 시의 길이와 제목 붙이기

사진=박주영, 하루를 견디는 힘
사진=박주영, 하루를 견디는 힘

초보자가 시를 길게 쓰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러나 짧게 시를 쓰는 버릇이 들면 긴 시를 쓰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어지간히 잘 쓰지 않고는 시의 깊은 맛을 우려내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너무 길게 쓰면 읽는 사람이 질리게 된다. 시가 아주 짧거나 아주 긴 경우에는 특별히 그렇게 쓴 이유가 있어야 된다.

시에서 최고의 경쟁력은 재미있거나 감동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없으면서 길게 쓴 시는 질리게 되고 재미없는 짧은 시는 쓰레기통에 던져진다. 시의 초보자나 젊은 사람이 짧게 쓰거나 인생을 달관한 듯 쓴 시는 공허하거나 염치가 없는 시가 될 수 있다.

독자가 시를 읽을 때 통상적으로 20~25행정도가 가장 알맞다고 한다. 더 길게 쓰거나 짧게 쓸 수 있지만 습작 기간에 이렇게 길이를 맞춰보는 것이 권장 된다. 이 길이는 보통의 시집 한 페이지 분량이다.

초보자는 처음부터 이렇게 행을 맞춰서 쓰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우선 시를 길게 써놓고 필요 없는 잡석을 골라내듯 줄여서 퇴고를 하는 방법이 좋다.

시를 발표한다는 것은 독자에게 시집가는 것이다. 시의 제목은 신부의 얼굴이다. 모든 독자는 제목부터 읽는다. 제목이 성공하면 그 시의 반은 성공한다. 내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제목은 절대 달지 않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가을 밤’으로 제목을 삼았다고 하자. 그 시는 읽으나마나 가을밤에 대한 설명인 것으로 짐작되어진다. ‘금강산의 사계’라던가 ‘내 어머니’라는 제목도 마찬가지다.

내용이 특별할지라도 벌써 제목이 진부하여 실패한 시가 된다. 이처럼 직설적인 제목은 그 제목에 예속되어서 시의 확장성에 문제가 생긴다.

다음은 필자의 졸시 한 편을 소개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민첩하게 지인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앙상하게 남은 세월 한 사발 들이마시고 여섯 남매 중 삼남인 내 품에서 당신의 집에 불을 끄셨다

나는 재빨리 골목 끝자락에 우뚝한 빈집의 문패를 바꿔달고 적당히 넓은 거실의 조명을 바꾸고 이층 서재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을 생각에 들떴고 줄 두 개의 완장을 찬 형님과 퉁퉁 부은 소복의 누님이 보도록 세 줄짜리 완장을 어머니 영정 옆에 공로패처럼 올려놓았다

어설픈 친척들과 내편인 문상객들은 유적을 발굴하듯 이태 전에 사드렸던 싸구려 한복 등을 끄집어내어 놓고 명품증명서를 발급한다 잔기침이 났지만 나는 얼굴색도 바꾸지 않는다

- 이어산, <아바타>전문

제목은 시 전체 내용과 의미로 연결되는 사물, 즉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가져와서 이미지로 연결하는 것이 시의 확장성에 훨씬 효과를 볼 수 있다. 지난 강좌에서 언급했듯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 스스로 사건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과 같다.

사건이란 범상한 상태에서 벗어나 뜻밖의 놀라운 느낌과 생각을 일깨워 주는 일이다. 그래서 사건이 없는 긴장감이 없는 시다.

이 말은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건으로서 읽을 맛이 있도록 해야 제대로 시가 된다는 말이다. 힘찬 체험, 상식과 기대를 벗어난 사건의 생생한 표현이 시의 뼈대를 이루도록 하여야 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독자의 예상과 기대를 힘차게 배반하여 뜨거운 울림이 있는 사건을 찾아내는 일이 시인의 할 일이다. 그러나 그게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고도 막막한 사건의 퍼즐을 맞추듯 밤낮으로 연구하고 형사처럼, 탐정처럼 부지런히 뛰지 않으면 시인의 영토를 넓힐 방법이 없다. 명시로 기억되는 시의 대부분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새롭게 접하는 울림이 있는 사건(事件)이다.

다음 시에는 어떤 사건을 형상화 했는지 살펴보자.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 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폐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 있는 시계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 문정희, <미친 약속>전문

문정희 시인은 "하늘이 흔들린 정도로 포효하며 열정을 다해 연애를 하거라"라고 <딸아 연애를 하라>라는 시에서 강조를 한다. 그리고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을 기다린다고 <다시 남자를 위하여>에서 갈구한다.

이것은 사랑을 저울질 하고 자존심 재다가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도전적 사건이다. “사랑하다가 상처를 입어보는 것이 사랑에 안 빠져 본 것보다 훨씬 근사한 것이다”는 연애론이다.

위의 시에서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고 했다. 참으로 당돌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시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을 수 있을 때 더욱 재미있고 긴장감이 생기게 된다.

감나무의 감이 익어가듯 변하는 것이 우리의 사람살이이며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감나무 한 그루가 '인생의 시계'란다. 그래서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고 절대란 없다고 한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