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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낭송 되지 않는 시는 쓰레기통에 버려라"
이어산, "낭송 되지 않는 시는 쓰레기통에 버려라"
  • 뉴스N제주
  • 승인 2020.01.10 23:0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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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칼럼(68)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시 창작 강좌(68)

□ 오래 말하는 사이

오래 말하는 사이로 출발
오래 말하는 사이로 출발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했지만 바슐라르는 "인간은 말하는 갈대"라고 했다. 인간에게 말이란 절대가치다. 인간관계의 대부분은 말로 이루어진다.

시인은 벌말을 다 버리고 가장 공감되는 알맹이 말만 말글로 전달하므로 모든 문학의 으뜸에 놓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사명은 자명하다.
말의 운용을 가장 합리적이고 공감되게 하되 벌말이 섞이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다.

말에는 고저와 강약, 운율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고저와 운율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진다. 인간은 운율적인 존재라고 한다.  글말인 시에선 소리로 들을 수 없으므로 운율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살이에서 운율을 빼버리면 삭막한 기계인간의 세상이 된다. 사람의 감정에도 운율이 있고 시에서도 운율이 빠지면 삭막한 산문이 된다. 반대로 산문에도 운율을 부여하면 시가 된다. 산문시가 그것이다.

운율은 인간의 호흡과도 같은 것이다. 시는 '호흡의 환희'라고 하는데 가장 읽기 좋은 시는 인간의 호흡에 맞춘 것이다. 호흡을 등한시 한 시는 시의 사지를 절단 한 것과 같다. 그래서 낭송이 되지 않는 시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라는 말이 나온다.

현대시가 운율을 등한시하게 된 이유는 서양의 산업혁명 이후 인쇄술의 급격한 발달 때문이었다. 그 이전의 시는 노래로 전달 될 수밖에 없었기에 운율은 대단히 중요한 시의 틀이었다.

인쇄된 책으로 시가 전달되고 공장에서 한꺼번에 많은 책을 인쇄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운율에 신경 쓰지 않아도 시를 전달할 수 있기에 운율의 중요성이 사라지게 되었고 결국 현대의 시는 자꾸 난해한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난해한 시에도 내재율(내적 운율)은 있어야 한다. 현대시가 외재율에서는 자유롭게 되었지만 내재율이 없는 시는 죽은 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적 운율이 있다고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시가 난무해서는 안 된다는 시인들의 인식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마음대로 시를 발표할 수 없었던 엄혹한 시대를 거치면서 시가 더 난해해져 버렸지만 근래에는 “난해한 시들이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던 시의 자리를 빼앗아 가버렸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난해하거나 실험적인 시도 시의 저변확대를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시의 주류로 흘러가도록 해서는 시를 다시 대중에게 돌려주기가 쉽지 않다.

시는 서정의 전달이다. 골치 아픈 미로 같은 시를 멀리하고 “음미할수록 맛이 나는 서정적인 시를 쓰자”는 운동을 [시를사랑하는사람들 전국모임]에서는 7년 전부터 해왔는데 근래에 ‘서정의 깃발아래 모이자’는 분위기는 점점 확산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올해 뉴스N제주와 공동으로 공모한 신춘문예에 3,500편이 넘는 시가 응모되었는데 여전히 신춘문예에서 선호하는 작품성을 이유로 난해한 시가 많이 응모됐다. 그렇지만 서정적이고 뛰어난 작품성을 갖춘 시도 많았음은 고무적인 일이다.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시사모와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뉴스N제주 신춘문예]에 일반시 3,507편과 시조 650편, 디카시 2,416편이 응모된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며 신분을 감춘 모 언론사의 기자가 취재를 왔었다.

모든 자료를 확인한 다음 자기의 신분을 밝혔는데 대단한 성과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의 대중화 운동의 첨병 역할을 할 ‘디카시’를 같이 공모한 것에도 큰 호응이 있었던 덕이라는 생각을 했다.

엘리트 시를 생활시로 대중이 즐기도록 하고자 했던 목표가 어느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한 결과다.

다음의 시를 한 편 보자

   너와 나의 깊은 왕래를 말로 해왔다
   오래 말 주고받았지만
   아직 목이 마르고
   오늘도 우리의 말은 지붕을 지나 바다를 지나
   바람 속을 오가며 진행 중이다
   종일 말 주고 준 만큼 더 말을 받는다
   말과 말이 섞여 비가 되고 바람이 되고
   때때로 계절 없이 눈 내리기도 한다
   말로 살림을 차린 우리
   말로 고층 집을 지은 우리
   말로 예닐곱 아이를 낳은 우리
   그럼에도 우리 사이 왠지 너무 가볍고 헐렁하다
   가슴에선 가끔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말할수록 간절한 것들
   뭉쳐 돌이 되어 서로 부딪친다
   돌밭 넓다
   살은 달아나고 뼈는 우두둑 일어서는
   우리들의 고단한 대화
   허방을 꽉 메우는 진정한 말의
   비밀 번호를 우리는 서로 모른다
   진정이라는 말을 두려워하는
   은폐의 늪 그 위에
   침묵의 연꽃 개화를 볼 수 있을까
   단 한 마디만 피게 할 수 있을까
   단 한마디의 독을 마시고
   나란히 누울 수 있을까.

   - 신달자, <오래 말하는 사이>

위 시는 이번 신춘문예 심사위원장이었던 신달자 시인의 시인데 시를 오래 쓴 대가의 시는 쉽고도 잔잔한 감동이 있다. 다시 읽어도 맛이난다. 
좋은 시란 독자와 오래 말하는 사이로 남는 시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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