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N인물](1)스물세 살 어린신부 처가에 남겨두고 유학 떠난 사연
[뉴스N인물](1)스물세 살 어린신부 처가에 남겨두고 유학 떠난 사연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0.01.06 0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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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주 박사의 미국 유학시절 돌아보며 쓴 자서

80년 초 제주의 생활은 다들 아시다시피 그러게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육지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결혼 후 유학의 길까지 오르고 대학교수까지 역임해 지금은 명예교수로 인공지능 강의까지 하고 있는 제주 구좌읍 출신 오병주 박사의 유학의 길에까지 오르게 된 과정을 공유해 본다. 꿈을 꾸고 다시 열정을 갖는다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행운까지 겹쳐지는 인생을 음미하면서 오늘의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이 되기를 빌면서 오병주 박사의 이야기를 3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편집자주)

◇ 고향을 떠나 대학에 진학하다

오병주 박사
오병주 박사

‘72년 초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부모님께 큰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집안형편이 넉넉지 못하여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을 하였는데, 대학을 그것도 부산까지 가서 다니겠다고 막무가내로 고집하여 부산대 전자공학과에 덜컥 합격을 해버렸으니 말이다.

등록금이 5만 원, 한 달 자취생활비가 5~6천 원 정도였는데 이것을 마련하시느라 부모님의 걱정이 얼마나 컸겠는가? 당시 소낭 밭 하루 품삯이 100~150원, 국민소득이 300달러 남짓 될 때였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농촌에서의 어려운 생활과 고생이었다. 여름 땡볕 무더위 속에서 조팥 두불 세불 검질(잡초)을 멘다는 것은 정말 힘든 노동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과마 웃드르(하도리 소재 산간지대에 이르는 말)에 있는 밭에서 메밀을 경작할 때는, 쑥이 얼마나 많고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 골갱이로 밭을 다 파내야 메밀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물론 나야 부모님을 도와 가끔씩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런 생고생을 하다 보니

어떻게 하든 농촌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하게 돼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우리 현대사의 큰 변혁기였다. 1학년 2학기에 유신헌법이 선포되면서 휴학에 들어갔고, 2학년부터는 매학기 중간고사 치를 때 쯤 되면 데모가 시작되었다. 3학년 때도 그랬고, 4학년 때는 육영수여사가 흉탄에 맞아 서거하는 일도 있었다.

학과 공부 외에 “아카데미” 라는 서클활동도 하였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이 시작한 흥사단의 학생 서클이었다. 법학, 경상, 문학 등 다양한 전공의 남녀 학우들과 어울려, 매주 토요일마다 정치, 사회, 문학, 인생 등에 관해 독서와 토론을 하곤 했다. 이 당시의 경험이 전공 이외의 소양과 세계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 국방과학연구소에 입소하다
당시 대학을 졸업하면서, 병역의무를 해결하며 취업이나 진학이 가능한 곳이 국방과학연구소(이하 ‘국과연’)와 과학원이었다, 운이 좋았던지 높은 경쟁률을 뚫고 국과연에 취업하게 되었다. 내 고등학교 동기 윤 박사가 근무했던 곳이다.

 당시 연구소에는 서울공대 수석을 차지했던 분을 비롯하여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근무했었다. 한번은 예비고사 제주도 수석을 한 분에게 “도 전체 수석이라면 뛰어난 실력인데,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어요?” 하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자기는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연구소가 ‘76년도에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오면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내 룸메이트가 KS 출신이었다. 친하게 지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경기고 자연계열에서 삼 사 등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수학책과 컴퓨터 책을 하나씩 선택해서 같이 공부하며 서로 질문을 하였는데, 큰 차이는 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진도나 이해의 깊이가 나를 앞섰다.

그는 특히 컴퓨터 분야에서 매우 뛰어났다. 그 후 유럽 어느 나라에서 특수기술을 전수받기로 하고 연수출장을 갔는데, 현지 회사에서 말하기를, 이런 연구원이 한국에 있으면 더 가르쳐줄 것이 없겠다고 할 만큼 뛰어난 친구였다.

당시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되었던 사람은 그 당시 소장으로 계셨던 분이다. 이분은 미국 MIT 출신으로 다른 박사들이 30분 이야기할 것을 5분만 이야기를 나눠도 전체 흐름과 문제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수재였다. 이런 분들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로 미사일 실험을 성공하게 되었다고 본다.

◇ 미국 유학길에 오르다
당시 국과연에는 미국 뉴멕시코대학(University of New Mexico, UNM) 출신 군인신분 박사들이 다수 근무했다. 뉴멕시코 주는 미국 남서부에 위치하며, 서부개척 당시 거점도시였던 Santa Fe가 주 수도이고, 앵글로색슨, 히스패닉, 인디안 문화가 혼재한 낭만과 예술이 넘치는 지역이다.

시골로 조금 들어가면 인디언보호 구역이 있고, 수공예품을 팔거나 크리스마스 때 축제를 벌이는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었다.

 UNM은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알버커키에 있는 주립대학이며, 시내에 샌디아국립연구소, 공군연구소, 주 남쪽에는 미사일 시험기지 등이 있다. 인근에는 2차 대전 당시 원자탄 개발을 위해 맨하튼 프로젝트가 수행되었던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가 있다.

내가 속했던 국과연 연구실의 실장도 UNM 출신이어서, 미국 유학을 계획하면서 자연스럽게 UNM을 선택하게 되었다.

미국 유학은 대학시절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학생상담실을 찾아가서 비용이나 추진 방법 등을 상담하곤 했었다. 일이란 우연히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내 경우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시절 장래 희망을 조사할 때 과학자나 대학교수가 되겠다고 손을 들었던 것을 보면, 어려서부터 꾸는 꿈이 자연스럽게 현실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깨닫게 된다.

병역문제는 국과연 근무로 해결이 되었고, 유학을 가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갓 천 달러를 넘어갈 때여서, 아르바이트로 해결하겠다는 각오와 젊은 혈기 하나로 유학에 도전하게 되었다.

유학수속이 복잡하였는데 토플성적, GRE성적, 대학 선택과 편지교류, 응시서류와 추천서 등 갖춰야 할 서류가 무척 많았다.

이 모든 것을 갖춰 UNM 전기공학과 대학원 과정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당시 월급도 많았고, 일에도 흥미와 긍지가 있었고, 장래가 잘 보장된 유망한 직장을 놔두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유학길에 오른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무모한 도전이었다.

결혼하여 얼마 되지 않은 스물세 살 어린신부를 대전 처가에 남겨놓고, 한 학기 생활비와 학비만을 갖고서 ‘81년 8월 10일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다음편 계속)

□프로필
1972년에 세화고등학교 17회로 졸업하고, 부산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하여, 1976년 졸업 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근무하고, 1981년 8월부터 1988년도까지 미국 뉴멕시코대 전기공학과에서 공학석사,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8년부터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근무하고, 1992년부터 2019년까지 한남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워싱턴대학 방문교수로 1년, 하와이 열방대에서 반년을 지냈다. 현재 명예교수로서 기술자문, 인공지능 강의 등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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