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시는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쓰는 것"
이어산, "시는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쓰는 것"
  • 뉴스N제주
  • 승인 2019.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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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칼럼(59) 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시 창작 강좌(59)

   □ 말하기와 보여주기의 시

가을에 만난 문학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데려와서 대신 말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만 알아도 시 짓기의 반은 성공한 셈이다.

즉, 시적 대상(사물)을 빌려서 우리의 인생사를 애매하게 말하는 문학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생사가 내포되지 않은 시는 사물의 서술이나 묘사(스케치)에 그치기 쉽다.

애매하게 말하라고 하는 것은 직설적인 표현은 내용이 드러나 버리기 때문인데 마치 내용과 결말을 알고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궁금증을 유발하고 사람살이의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진술을 넣은 시가 시로서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시는 '말하기(telling)'가 아니다. '보여주기(showing)'다.

'말하기'는 현상을 설명하거나 푸념, 넋두리, 또는 추상적인 것이라면 '보여주기'는 새로운 언어로 집을 지어서 독자 앞에 내어놓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독자를 너무 의식하지 말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시를 단 한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알아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시를 발표할 필요가 없다. 시를 세상에 내어놓는다는 것은 시인이 발견한 새로운 서정을 독자들과 나누는 일이기에 그렇다.

자기의 시를 알아줄 한 사람을 위해 쓴다는 것도 어떤 경우에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도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강력범죄를 저지를 방법을 시로 썼다고 했을 때 그것을 반기는 사람만을 위해서 시를 쓸 수는 없는 것처럼 시는 공감의 문학이기에 될 수 있으면 많은 독자가 감동할 수 있도록 쓰도록 노력하는 것이 시인이라는 이름가진 사람들의 의무다.


   두부를 자르다
   양파 껍질을 까다가
   뿔을 보았다
   하얀 양파 머리위로 불쑥
   파아란 촉이 둘

   어린 노루의 뿔
   소년이 된 누렁이의 첫 뿔 닮은

   쓱싹
   무신경한 척 자르면서
   흠칫 칼날을 본다
   혹여
   익숙한 핏물이 배어
   젖어있을까 겁이 나서

   살았다 말하는 것 모두
   소리로 토하지 않는다는
   너의 뿔이 겁이 나서

   당근 촉을 지나쳐
   산다

    - 김영란, <양파, 네게>


위 시는 시사모 동인시집에 실린 김영란 시인의 시다. 양파 껍질을 까다가 ‘어린 노루의 뿔/소년이 된 누렁이의 첫 뿔 닮은’ 뿔을 보았단다.

자세히 보면 양파와 뿔을 대비시키면서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뿔을 자식에 대한 것으로 치환해 본다면 이 시는 쉽게 읽히면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혹여/익숙한 핏물이 배어/젖어있을까 겁이 나서’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말을 자식에게도 다 말 못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

‘당근 촉을 지나쳐/산다’ 절창이다. 당근에 촉이 나면 잘라 주어야만 그 맛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함부로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지나쳐 산단다. 자식도 독립된 인격체이기에 부모라도 함부로 할 수 없음을 에둘러 말한다.

시는 강력한 낱말을 재료로 하는 언어의 덩어리다. 즉, 적확(的確)한 언어를 골라서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위 시처럼 절제된 언어를 덩어리화 시켜서 직접 하고 싶은 말을 사물을 데려와서 하고 있다. 돌려서 말하는 현대시의 작법을 교과서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등장하는 사물에는 그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첫 행에 ‘두부를 자르다’고 했는데 사실 그 두부는 역할이 없다. 정황상으론 이해가 되지만 양파를 ‘자르다’ 보다는 개연성이 줄어든다. 이런 약간의 아쉬움이 있긴 해도 좋은 시다.

"시는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쓰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구나 보았을 양파의 촉이나 당근의 싹에서 뿔을 대비시켜서 자기의 인생 이야기를 하듯,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남들과는 다르게 보거나 정확하게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더 좋은 시를 짓기 위해서는 시인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시에 등장하는 사물의 눈(입장)으로 사람살이와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이것은 개연성을 발견하는 능력이기도 하는데 처음 말했듯이 사람살이와 연결되지 않은 시는 산문처럼 사실을 묘사하는데서 그치므로 독자는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래서?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 이어산 <생명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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