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고충석 자전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의 인생 스토리
제주대학교 제7대 고충석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 칼럼이 가을을 맞아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이 장에서는 고충석 총장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여러 교수들에 대한 회상애 대해 서술했다.
먼저 정진오 교수다. 정 교수는 머리가 뛰어나고 박식했지만 술로 인해 삶이 망가졌다. 그의 절창은 사랑의 추억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의 절망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 양우진 교수인데 인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분으로, 고 총장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의 조언 덕분에 총장직을 수행하게 되었고, 경제적 고통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을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묘사도기 있다.
이어 고남욱 교수다. 고 교수는 착한 심성을 가진 분으로, 즐거운 추억이 많았다. 병마와 싸우다 일찍 세상을 떠난 그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마지막으로 김광택 교수인데 그는 훌륭한 인격자로, 화를 내지 않는 분이었다. 그의 부드러운 성격과 함께한 즐거운 기억들이 남아 있다.
고충석 총장은 이들 모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물들이라고 회상하며, 그들의 인생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마무리를 지었다.
"행동은 검소하게, 꿈은 고상하게 꾸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충석 전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제30장
자유로운 영혼들
정진오 교수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정교수는 절망 그 자체로 살다가 가셨다.
행정학과 동료 교수였고 교수 아파트에 7~8년 같이 살았다. 내가 그 분에게 고대 천재라고 별명을 붙일 정도로 머리가 좋고 박식한 분이었다. 제대로 공부하고 노력했다면 주목받는 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미 교수가 되기 전부터 술로 인생이 많이 망가졌다. 참 아까운 분이었다.
술에 취해서 과거 지리산을 거점으로 암약했던 빨치산들의 노래로 알려진 부용산(아래)을 부를 때는 따라 울고 싶어질 질 정도로 절창이었다.
그 노래는 총각 시절 사랑했던 여자와 연애를 할 때 같이 부르던 노래라고 했다. 그 여자가 지병으로 일찍이 저세상을 하직하는 바람에 인연도 맺지 못하고 노래의 추억만 남았다고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던 마음이 고운 사람이다.
지금도 정 교수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 온다. 그리고 그 절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솔밭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대인의 관상을 가진 양우진 교수님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좀 과장법을 쓰면 제주대학 교수치고 그분의 술. 밥을 안 얻어먹은 사람이 거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인정이 많으신 분이었다. 돈을 잘 쓰고 통도 크고 마음도 따뜻한 분이었다.
이분에 대해 일화도 많다.
겉 모습과는 달리 마음은 무척 여린 분이다. 병아리 한 마리도 죽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약하신 분이다. 어느 정도의 영웅 심리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이 분도 변시민 학장 때 재임용에 탈락한 전력이 있어서 애초에는 나를 변시민파로 분류, 적대적이었다. 김두희 교수의 중재로 화해했고 많은 날 술도 같이 먹고 어울려 다녔다.
나에 대한 기대도 컸다. 총장선거가 끝난 후 내가 관사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에게 전화해서, 총장업무를 위해서는 반드시 관사에 입주해야 한다고 30분 정도를 설득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분의 유언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 충고에 따라 총장에 취임한지 3,4개월 지난 한창 더운 여름에 관사에 이사했다. 그 정도로 나의 처지를 잘 이해해 주신 분이었다.
내가 총장 취임하기도 전에 양 교수님은 황급히 저세상으로 떠났다. 말년에 경제적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귀하게 산 사람이 그 고통과 자존심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을까.
양 교수를 보면서 관상에 대한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관찰한 바로는 남자가 이목구비가 수려한 사람치고 그 인생이 충만한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 교수도 그 범주 안에 들어간다. 이 가설이 인물의 외모가 오늘처럼 상품화된 천박한 시대에는 적용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만년 소년 같은 고남욱 교수님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골수암으로 입원해 있던 서울대병원에 문병 차 갈 때만 해도 꽤 버티실 것 같았는데 한 달 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심성이 참 착한 분이다. 이 험한 세상을 살기에는 너무나 맑은 영혼을 지닌 분이었다. 술과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여자들하고도 담소 나누기를 즐거워했다.
술자리에서 나는 짓궂은 장난을 많이 했지만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그 양반이랑 젊은 날 같이 즐겨 부르던 ‘불 꺼진 창’, ‘비목’ 같은 노래가 추억이 되었다.
나와는 12살 차이지만 그 간극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공유했던 추억거리가 많다. 총장에 입후보, 낙선하면서 마음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다정다감한 분이신데 그 병마를 오랜 세월 동안 싸우느라고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오랜만에 만났는데 병마를 다 극복했다고 좋아했다. 이제는 고 총장하고 젊은 날의 그때처럼 자주 만나 와인도 한 잔씩하고 그때 소녀들에게도 한번 연락해보자고 객쩍은 농담을 건네며 커피숍을 나와 찬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광양 사거리에서 헤어졌다.
성한 몸으로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인생무상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같이 보냈던 세월을 생각하면 가슴의 심연에서 사막이 생기고 막막함이 나를 질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김광택 교수님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내가 만난 분 중에 가장 부처에 가까운 분이었다. 화를 내시는 그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인격자였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스무 살도 훨씬 더 되지만 갓 부임한 나를 친구처럼 서문통 제주극장 근방 소위 ‘고망술집’에 가끔 데리고 갔다.
거기 가면 늙은 술집 주인이 광택 오빠 오셨냐고 하면서 무척이나 반갑게 맞아 주었다. 너무나 착한 분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김두희 교수님이랑 관덕정 근방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전화로 나오시라고 해서 밤늦도록 함께 술을 마셨다.
그날 마신 술 탓도 영향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얼마 않되 두 번째 쓰러졌다. 그 후유증을 안고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돌아가셨다.
가끔 선생님에 대해 일화를 생각하면 혼자서 웃음이 저절로 나오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소꿉장난 같기도 하고 코미디 같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젊은 날 선생님하고 술 마시러 고망술집을 찾아다니던 순진무구했던 청춘이 그립다.
이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본다.
전부 다 개성이 강하신 분들이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소소한 재미를 붙이면서 인생을 사신 분들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나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