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 칼럼](3)수십억 개 바람된 4.3영혼: 한라산이 웃는 날 10월 10일
[이문호 칼럼](3)수십억 개 바람된 4.3영혼: 한라산이 웃는 날 10월 10일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10.14 08: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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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안덕출신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 통신기술사
2008 이달의 과학자상, 2013 제주-전북도 문화상 수상
제주와 인도의 고대 연결고리, 탐몰라주에서 탐라까지
제주4.3 사건과 한강의 문학적 유산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평화재단

탐라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고 있는 제주 출신 이문호 교수가 뉴스N제주를 통해 독자들과 만났다. 점점 흥미로운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이문호 칼럼이 독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번 제2장에는 '수십억 개 바람된 4.3영혼: 한라산이 웃는 날 10월 10일'이라는 제목으로 제주4.3 사건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야기와 4.3으로 인해 피해를 봤던 자신의 가정사와 제주도의 현황을 알 수 있는 글을 올렸다.

2024년 10월 10일, 광주 출신의 한강 작가가 제주4.3 사건을 다룬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문호 교수는 "이는 제주4.3 사건 발생 76년 만의 일이며, 역사적 의미가 깊다"며 "한라산의 백록담 위에 흰구름이 지나가며 이 순간을 축하하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표현했다.

이 교수는 선친의 고난과 생존 이야기에 대한 내용도 언급했다. 이 교수의 선친은 1924년생으로,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군에 동원되어 고사포 대공포 진지를 구축했다. 그 과정에서 손가락을 다치는 부상을 당하였고, 이는 그의 운명을 갈라놓은 상처로 여겨진다.

1948년 12월, 4.3 사건으로 인해 동네 청년들과 함께 끌려갔고, 그 중 29명이 총살당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4.3 사건의 잔혹함과 그 상처

4.3 사건은 제주도민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당시 어머니와 필자는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안덕지서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는 힘든 기억을 떠올렸다. 이러한 아픔은 오늘날까지 제주도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했다.

한강의 문학적 접근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4.3 사건의 희생자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그들의 고통과 애도를 문학적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은 개인의 삶에 역사적 비극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탐구하며, 과거와 현재의 상처를 연결짓고 있다.

이문호 교수는 제주 4.3 사건에서 희생된 3만 5천명의 영혼은 여전히 한라산을 넘고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 우리는 그 아픔을 기억하며, 과거를 직시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 자세한 것은 본문을 살펴보자.

이문호 교수님은 전 세계 다양한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고 2008 이달의 과학자상, 2013 제주-전북도 문화상 수상을 하기도 했는데 다방면의 경험과 예지능력으로 제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이문호 교수는 제주 안덕 서광서리가 고향이며, 전북대 전자공학부 학부장 및 교수(1980-2018), 전 세계 다양한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과 2008 이달의 과학자상, 2013 제주-전북도 문화상 수상을 하기도 했다.

▲“발타라 존자와 벽랑공주는 왜 탐라에 왔을까?” (동국대, 2023)▲“The Natural Intelligence of the Wind Castle Design” (Springer Nature, 2021)▲“The Covid-19 DNA RNA Genetic Code Analysis” (Intech Open, 2022)▲“탐몰라주에서 탐라” (제주일보, 2024) 등 논문 및 발표 등으로 자신의 철학을 갖고 있는 이문호 교수님의 건강을 빌면서 '탐라'의 새로운 이야기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빌어 본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제3장

수십억 개 바람된 4.3영혼: 한라산이 웃는 날 10월 10일

이문호 교수
이문호 교수

한라산이 웃었다.

1948년 제주4.3사건나고 2024년 10월10일 광주출신 한 강의 4.3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게 76년만 일이다. 오늘 새벽에 한라산 백록담 위로 흰구름이 동서로 가로질러 지나며 입을 벌려 웃는다. 다음은 "네 차례라고".

필자의 선친은 1924년생, 일제 강점기간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정뜨르 비행장과 단산(簞山335m)에서 일본군의 진지구축에 동원됐다. 

단산 바굼지 암벽에 진지를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산은 모슬포 알뜨르 일본군 전투기 비행장을 엄호하기 위한 고사포 대공포 진지 구축 지대였다. 단산 진지 구축 동원 기간은 1945년 3월 26일부터 4월 25일까지 한 달 간  바위에 구멍을 ‘끌’로 파 나갔고, 바위 구멍에 화포 약을 삽입해 바위를 깨나갔다.

그러던 중 왼손 약지손가락이 끌에 맞아 큰 상처를 입었다. 

어느 정도 나았지만, 구부러진 채 살다 가셨다. 농사 지으면서 구부러진 ㄱ자 손가락 마디가 ‘쇠스랑(Pitch Fork)’처럼 변해서 그렇게 살았다. 아들을 보고싶다고 해서 할머니와 어머니와 둘이서 단산앞 ‘개죽은 못’에 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이고, 내 새끼야" 햇볕에 탄 세 살짜리 얼굴에 마른 버짐을 보고 안쓰러워 한 말씀이라고 훗날 어머니께서 알려줬다. 밭일을 하는데 같이 쫓아다녔기 때문이다. 오늘도 저승에서 혹시, "아이고, 새끼도" 불효(不孝)를 나무라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3년 후, 선친은 1948년 12월 초, 4.3사건 때 동네 30명 청년들과 안덕지서에 끌려가 29명이 보리밭(현천주교 화순리성당)에서 총살을 당했다. 

음력 10월 28일에 동네 제사가 제일 많다. 

끌려간 청년들이 모두 죽었으니 시체를 인수해 가라는 연락을 받은 어머니와 나(5세)는 소개지인 덕수리 ‘말니겁’ 할아버지 집에서 구루마(마차)를 빌려, 안덕지서로 가면서 어머니께서 "‘아방이 살아시냐, 죽어시냐?" 울면서 묻고 또 물었다. 

그때 대답은 지금도 기억하는데, "아방 안 죽어서, 피가 다리에...”,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조상께서 대신 말해준 것인가. 

혼자 선친이 살아나왔는데 다리엔 온통 피투성이었다. 

그때 선친이 나이가 25세, 두 손이 철사 줄에 묶일 때, 손가락 때문인지 조금 헐거웠고 키가 커서 맨 뒷줄에 섰기 때문에 30명 중에 혼자만이 죽을 액(厄)을 면했다.

약지 ㄱ자 손가락이 딱 운(運)을 갈랐다.

68년후, 95세의 선친은 돌아가시기 두 해 전에 술만 드시면 “천지현황(天地玄黃), 한일(一), 두이(二), 석삼(三)”을 입에 달고 사셨다. 

“대학교수 큰아들아, 이 말이 뭐고.”
“…….”

대답을 못하면 “설러불라”로 역정을 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13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한덕수, 이하 위원회) 제34차 회의에서 8,796명(희생자 49명, 유족 8,747명)이 4·3희생자 및 유족으로 추가 결정됐다(4.3평화공원 위령제단 위패 1)<br>
4.3평화공원 위령제단 위패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며 철없는 세 살 아이가 어느새 흰머리가 된 자식이 못내 안쓰러워인가, “설러부러”다. 

유언(遺言)이 된 1, 2, 3. 어디에 감춰 놓았을까? 돌아가신 후에야 그 말의 뜻을 수학으로 풀었다. 본 칼럼에서 제1편 때 윈드 캐슬(Wind Castle)에 약간 언급이 됐다.

당신은 4.3사건과 6.2 전쟁통에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웃드르 광챙이에서 새벽 3시면 정한수를 장독대에 떠놓고 한라산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필자는 1980년대 전주에서는 건지산 왕릉 이한(전주이씨 이성계이씨조선 선대)묘와 지금 서광에서는 광화사 부친 공덕비 1.2.3에 절을 올린다.

김봉주(당시 70세) 외조부는 4,3때, 소개(疏開)를 못해 서광서리 꽝수밭 곶자왈(현 신화역사공원) 굴에 숨어 지냈다. 외삼촌인 20세 김영기는 산사람에 붙잡혀 폭도가 됐고 외조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산사람들에 인질로  잡혔다.

끝내 삼동나무에 철사로 손목을 메단채 총살을 당했다고 추정된다. 

삼동나무에 하얀 손목 뼈가 다랑 다랑 매달려있는 것을 동네 이명선씨(현88세)가 발견했다. 1952년 경 봄에 백골로 된 시체에 도장 함자가 유일한 증거가 되어 시신을 확인했다. 

당신이 손목을 묶여 저 세상가면서도 사위 손가락을 ㄱ자로 만들어 4.3사건 때 30:1 총살현장에서 목숨을 구해주고 가셨다고 동네 사람들은 말했다. 제주도민은 4.3때 아픈 ’손가락‘ 한 둘을 갖고 산다.

한편, 한강 노벨문학상제주4.3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2021)는 희생자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잔혹한 현실을 생생히 그려낸 ‘증인 문학(witness literature)’이라는 장르에 접근해간다고 했다.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의 상처를 넘나들며 고통과 애도를 이야기하는데, 작품의 제목처럼, 작별을 고하지 않은 상처들은 계속해서 현재에 영향을 미치며, 이를 통해 작가는 역사적 비극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탐구했다.

3만 5천명의 4.3 제주희생자는 수십억 개 바람이 된 영혼이 한라산을 오늘도 넘고 있다. [다음에 계속]

◆이문호 교수 프로필
moonho@jbnu.ac.kr 
본적: 안덕 서광서리 
주요학력 및 경력
전북대 전자공학부 학부장 및 교수 
1980-2018. 현 명예 및 초빙교수
1990 일본동경대 전자과 공박,1984전남대 전기과 공박. 통신기술사.
1985-1986 미국미네소타대 전기과 포스트닥.
1998 독일 아흔공대 및 뮌헨공대 초빙교수,
2001호주 RMIT 및 울릉공대 초빙교수,  
1970-1980 전 제주 남양 mbc 송신소장.
1969 전 제주 제일고 교사.
2008 이달의 과학자상, 2013 제주-전북도문화상,  
2015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한림원 정회원

*칼럼리스트가 쓰고 있는 이 칼럼은 뉴스N제주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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