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29)별명 제조기 김순택 교수
[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29)별명 제조기 김순택 교수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4.10.06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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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제7대 고충석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 칼럼이 가을을 맞아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이 장에서는 별명 제조기 김순택 교수에 관한 내용이다.

김순택 교수님은 고충석 총장과는 형과 같은 존재로, 술을 자주 마시며 깊은 정을 나눈 분이다. 그는 교수들에게 적합한 별명을 붙이는 능력이 뛰어나, 그 별명에는 개인의 성격과 특징이 담겨 있었다.

예를 들어, 고총장에게는 일본 정치인 다케시타와 관련된 별명이 붙여졌고, 이는 고 총장의 성격을 잘 표현한 것 같았다.

김 교수님은 당뇨로 고생하시다 임종을 맞이하셨고, 마지막 순간에도 나의 총장 선거를 응원해주셨다.

그의 죽음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그가 남긴 사랑과 가르침은 여전히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는 이혼에 대해 경고하며 초혼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따뜻한 분이었다. 이제 그는 편안한 곳에서 영면하고 계실 것이다. 김 교수님의 스토리를 더욱 들어가 보자.

 "행동은 검소하게, 꿈은 고상하게 꾸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충석 전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제29장

별명 제조기 김순택 교수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김순택 교수님은 나의 형님 같은 분이었다. 나하고 술도 많이 마셨고 정도 많으신 분이다. 참 나를 지극히 아껴주셨다. 이런 연유로 그 분과는 추억거리도 많다.

그의 특기라고나 할까, 교수들 별명을 작명하는데 있어 일가견이 있다. 작명대상자의 장단점, 성격을 잘 파악해서 맞춤형으로 기상청외한 이름을 붙여 주곤 했다.

술을 잘 산다 해서 좋은 별명을 지어 주지 않은다. 그가 붙인 별명을 잘 분석해보면 거기에는 연극성과 그 사람의 인격성까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어떤 별명을 붙이느냐에 따라 당사자에게는 희비가 엇갈린다. 예컨대 그 당시 회자되던 별명에는 코만치, 황우럭. 분소레기. 퐁키, 퐁낭, 코생이, 쓰루, 켓트, 고희주, 돌쇠. 세인트, 양쥐, 정바지, 번지없는 주막, 소란드 등 웃지 못할 별칭들이 있다. 이 중 많은 분들이 고인이 되었다.

나에게는 일찍이 ‘다케시타’라는 과분한 별명을 붙여줬다. 다케시타는 당시 일본 자민당 출신 정치인으로서 총리까지 지낸 타협과 협상의 대명사다.

그런 별명을 작명한 배경에는 술자리를 재미있게 잘 리드한다고 평가해서 붙였거나 앞으로 성격을 잘 관리해서 다케시타처럼 되라는 의미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또 다른 별명은 베토벤에서 베자를 떼고 그 자리에 고자를 놓아서 고토 벤이라는 별명도 붙여줬다.

그 당시 나는 장발이었는데 아마 그 헤어스타일이 베토벤을 닮아서 그런 작명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 이런 작명에 비추워 나를 생각해보면 다게시다 나 베토벤 같은 거인의 넥타이 핀 정도는 살았지 않았나 하고 주제넘은 생각도 해본다.

오해없기를 바란다. 별명도 일종의 자성예언(self–fullfing prophecy의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김 교수님은 당뇨로 고생이 많으셨다. 나의 총장 선거가 한창일 때라 자주 병문안을 가지는 못했다. 그런데 임종이 임박한 것 같다고 누가 전해 줘서 슬픈 마음으로 문병하러 갔다. 꼭 총장 선거에 당선되어야 한다고 격려와 응원을 해주셨다.

죽음에 초연해있었고 ‘누구’를 용서하고 저세상 간다고 말했다. 제삼자의 일인지라 그 함자는 밝히지 못한다. 총장 선거 다음 날 발인이 있었다.

총장 선거가 결선까지, 선거를 세 번 치렀다. 참 피 말리는 선거였다. 그때마다 제주대 교수로 있는 김순택 교수님의 두 아들은 번갈아 빈소를 지켜가며 투표에 참여했다.

참 고마운 두 교수다. 김순택 교수님이 며칠만 더 살아계셨더라도 총장 당선의 기쁨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너무나 아쉬웠다. 김 교수님과의 돈독했던 정은 큰 자제이신 김희철 교수에게 승계되어 오늘날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

김 교수님은 살아 생전에 나에게 이혼만큼은 해서는 안 된다고 주지시키면서 이르기를, 한번 이혼하면 반드시 세 번 이혼한다는 속설이 있다고 강조하셨다. 그 근거로 확률적인 통계도 간혹 인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초혼을 인내하면서 잘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님께서 주신 사랑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먹먹해진다. 정말로 마음이 따뜻한 분이다. 격정적이고 솔직한 마음 때문에 총장 출마를 두 번인가 하면서 동료, 후배 교수들로부터 인간적 배신도 많이 당했고 그로 인한 마음에 상처도 깊었다.

그래서 더 건강이 악화되었는지 모른다. 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진드기 같은 군상들이 없는 저세상에서 편안하게 영면하고 계실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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