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 명예교수
한국예술문화 대상, 해양문학상, 전북문학상, 전북 아동문학상, 소년 해양문학상, 새전북 문학상, 디카에세이상 첫 수상자
제123장
스위트 홈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곡은 미국의 애국가입니다.
그러나 "성조기여 영원하라" 보다 미국인이 애창한 노래는 아마 존 하워드 패인(John Howard Payne)의 '홈 스위트 홈'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는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군과 북군이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전투를 하고 있을 때 이 노래와 관련됐던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에서 양쪽 진영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팽팽히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전투를 하고 밤이 되면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 양쪽의 군악대는 매일 밤 음악회를 열었는데, 어느날 밤 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북군 군악대는 아주 특별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바로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즐거운 나의 집)이었습니다.
그 멜로디는 바람결에 새털처럼 전쟁터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 순간 그리운 가족이나 연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던 군인들은 사무친 그리움에 텐트 밖으로 나와서 노래를 함께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멜로디는 강 건너편에 있던 남부군 진영에도 울려 퍼졌습니다.
남부군 군악대도 덩달아 이 음악을 연주하고 남부군도 북부군도 다 함께 합창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상대방이 적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강으로 뛰어 나와서 서로를 얼싸안고 모자를 하늘로 높이 던져 올리며 환호했습니다.
이 장면을 취재했던 프랭크 막심은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다들 미쳤다!"라고 말입니다.
노래 한곡 때문에 전쟁은 사라지고 오직 조국과 동포애만 남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즐거운 나의 집>의 멜로디는 전쟁 중에 서로의 적대감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로 시작되는 바로 그 노래입니다.
원 제목은 ‘홈 스위트 홈 (Home Sweet Home)’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중학교 시절 ‘즐거운 나의 집’으로 번안되여 모두가 즐겨 불렀던 세계적인 명곡입니다.
노랫말을 지은 ‘존 하워드 패인’(1791.6.9~1852.4.10)은 미국의 극작가이자 배우였는데 그는 열세살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마저 세상을 뜨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존 하워드 패인은 아버지가 웅변 선생이였던 덕분에 그 특기를 이어받아 극작가 겸 배우가 되었습니다.
그는 열세 살되던 해에 부모와 사별한 이후부터는, 그에게는 평생 집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웅변선생이었던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배우가 된 그는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영국 무대에 진출한 연예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헨리 비숍이 곡을 붙인
그의 이 노래는 오페라 ‘클라리 밀라노의 아가씨'(Clari, The Maid of Milan)에서 불려져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노래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초라해도 내 집만한 곳은 없다"라고 한 이 노래는 그가 어머니와 아버지하고 같이 살던 그 집 외에는
자기 집이라고는 평생 가진 적이 없었던 그였고,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떠돌았던 게 그의
한평생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은 프랑스 파리에서 동전 한 푼
없이 떠돌며 사는 신세다보니 더 그의 고향집이 그립고
간절해져서, 이 노랫말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1842년 튀니스 주재 미국영사관에서 10년간 지내며
거기서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죽기 한 해 전에 친구에게, “나는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하도룩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해주었지만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은 없었고,
그 맛을 모르고 살았소.
그리고 앞으로도 그 맛을 보지 못하고 살 것 같소.”라고
편지를 써서 친구에게
보냈습니다.
이 사연은 그가 사망한 후
31년이 지나서야 미국 정부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군함을
보내 즉시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운구해 왔습니다.
유해가 도착하던 날,
뉴욕항은 미국 대통령과 영부인을 비롯하여 많은 저명인사와 수많은 시민들과
65명으로 구성된 밴드가
'홈스위트 홈'을 연주하면서 죽어서야 그의 부모와 같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맞았습니다.
그를 열광하며 환호하던
시민들은 그의 유해가
내려오자 모두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의 묘는 워싱톤 근교
더 오크 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죽어서야 집을 구한 그의
묘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미국을
건강한 나라로 만들어 주신
하워드 패인을 평안히 잠들게하소서'라고요...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았고
죽어서 최고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HOME SWEET HOME,
FOREVER!"
우리는 각자의 보금자리, 가족이 있고 가정이 있는
나의 집으로 돌아가 평생 사랑과 화평의 미소를 나누며 살 수 있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 옮겨온 글
시인 유응교 '그리운 것이 아름답다'라는 시집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해학과 웃음, 그리움을 선사하는 전북대 건축학과 유응교 교수가 뉴스N제주에 그의 시조를 소개하는 '유응교 칼럼'을 연재합니다.
그는 둘째 아들(저자 유종안)이 쓴 '대한민국 브랜드 파워'라는 책을 보고 ▲태극기▲무궁화▲한글▲한복▲한식▲한옥▲한지▲국악(판소리)▲아리랑▲인쇄술(직지심체요절)▲조선왕조실록▲사물놀이▲전통놀이▲K-Pop▲도자기(달항아리)▲팔만대장경▲거북선▲태권도▲한국의 시조▲한국의 온돌-아자방▲한국의 막걸리▲한국의 풍류-포석정▲한국의 불사건축-석굴암▲한국화 김홍도의 씨름 등 총 24개의 항목에 대해 동시조와 시조로 노래해 대단한 아이디어 창조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공학박사 유응교 시인은 지난해 11월 청와대에서 열린 사)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8주년 창립기념식에서 디카에세이상 시상위원회(위원장 장영주)와 뉴스N제주(대표 현달환)가 협력약정서를 맺어 가진 우리나라 최초로 공동 시상하는 디카에세이상에 첫 수상자로 얼굴을 알리는 영광도 가졌다.
유응교 시인은 전남 구례 ‘운조루’에서 출생해 1996년 「문학21」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년문학』 동시 부문 등단,
칼럼집 <전북의 꿈과 이상>, 유머집 <애들아! 웃고 살자> 외 3권, 시집 〈그리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외 25권, 동시집 <까만 콩 삼 형제>외 1권, 동시조집 〈기러기 삼 형제〉외 3권 등을 펴냈다.
한국예술문화 대상, 해양문학상, 전북문학상, 전북 아동문학상, 소년 해양문학상, 새전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전북대 공대 건축과 교수, 전북대 학생처장, 미국M.I.T 연구교수,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건축 추진위원장, 전북예총 부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전북대 명예교수다.
유응교 교수님의 해학과 웃음, 감동을 주는 시조를 앞으로 매주마다 뉴스N제주를 통해 독자와의 만남을 가질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