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카즈(PREKAZ) - 저항의 장소
아흐메트 델리아(AHMET DELIA) 와 도끼 전투
파시치의 경찰이 드레니차의 여러 마을에서 탄압을 시작하자, 아흐메트 델리아는 세르비아의 의도를 깨닫고 드레니차의 지도자들을 자신의 탑에 모았으며, 전사들과 함께 그들의 베사를 다시 맹세했다.
1913년 1월 초, 세르비아 경찰의 폭력적인 범죄 행위가 드레니차 사람들을 향한 범죄의 고리를 조여 오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땅과 알바니아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기로 맹세하며, 형제, 이웃, 마을을 지키기 위해 결연히 저항하기로 다짐했다.
아흐메트 델리아의 돌집에서 베사를 맹세한 지 며칠 후, 13명의 세르비아 경찰이 프레카즈로 향해 두세 가구를 약탈하며 테러를 일삼고 있었다. 이 소식은 아흐메트 델리아에게 전해졌고, 그는 전사들을 소집했지만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 행동에 나섰다.
그는 단호하고 빠르게 도끼를 집어 들고 아들 무르셀에게 이웃을 보호하자고 외쳤다. 아흐메트와 그의 아들 무르셀은 주저하지 않고 이웃을 돕기 위해 도끼를 들고 나섰다.
마당 입구에서 그들은 세르비아 경비병과 마주했고, 그곳에서 체트니크의 총과 아흐메트 델리아의 도끼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흐메트 델리아는 승리를 거두고 세르비아 경비병을 쓰러뜨렸다.
마당 안으로 들어가자 무르셀은 세르비아인의 소총을 빼앗아 사용하여 몇몇 경찰을 사살했다. 아흐메트 델리아는 탑을 습격했다. 계단 입구에서 또 다른 경찰과 맞닥뜨리자 아흐메트는 도끼로 그를 공격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그 사이 아흐메트는 중상을 입었고, 프레카즈의 다른 전사들인 람 이슬라미, 젤라딘, 제툴라, 하이레딘과 다른 용감한 총사들이 그 장소를 포위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베사를 맹세한 이들의 영웅적인 저항 속에서 아흐메트 델리아는 자유의 제단에 쓰러졌고, 경찰 파견대 중 12명이 사망하고, 유일하게 요반이라는 자만이 도망쳤다. 드레니차에서 조국 해방을 위한 전투 조직은 절대 중단되지 않았다.
해방 노력은 용감한 지도자 샤키르 스마카의 지도 아래 계속되었고, 그의 죽음 후에는 아젬과 쇼테 갈리차가 운동을 이끌었다. 전 민족 해방 저항 활동을 하는 동안 아흐메트 델리아의 아들 무르셀은 아젬 베이타 갈리차 그룹에서 가장 두드러진 전사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가장 신뢰받는 사람이었다.
무르셀은 한 순간도 총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1930년 스코페의 한 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무르셀의 유일한 상속자인 아들 제넬도 현재는 생존해 있지 않다. 아흐메트 델리아의 모든 활동은 조국 해방 저항을 위한 것이었다.
타히르 메하(TAHIR MEHA)1)
세르비아(SERB) 점령자를 무찌른 5월 13일의 용사
조국을 위한 아뎀 야샤리의 희생의 선구자이자 굳건한 용사, 타히르 네비 메하(Tahir Nebih Meha)는 1943년 10월 10일 드레니차의 프레카즈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진정한 상징이었다.
그의 아버지 네비(당시 71세)와 함께, 타히르는 1981년 5월 13일 자신의 조상 탑집을 유고슬라비아 점령자들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타히르의 할아버지 에민 라티는 아젬 베이타와 함께 코소보 민족운동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인물로, 예리한 시선과 결단력을 가진 전사였다.
아젬 베이타가 1924년 6월 14일 암살된 후, 에민은 아젬의 소총을 자랑스럽게 간직했고, 1941년 그의 아들 네비에게 넘겨주어 그가 알바니아 민족 방어군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도록 했다. 네비의 손에 쥔 아젬 베이타의 총은 드레니차 전쟁에서 샤반 팔루자의 지휘 아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타히르 메하 역시 그 길을 이어갔다.
1981년 5월 13일2)
당시 코소보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며 일어섰다. 세르비아 점령자들에 의해 수십 년, 수 세기 동안 억압받아온 자유를 위해 싸우는 청년들이 많았고, 그들의 죽음은 수천 명의 새로운 사람들을 각성시켰다.
학생, 노동자, 농민, 교사, 연금 수령자까지 모두가 일어났다. 타히르 메하의 총성과 그들의 목소리는 유고슬라비아의 점령 체제를 흔들었다. 드레니차에서는 영웅적인 저항이 반복되었다. 타히르 메하는 오소 쿠카가 그랬듯이 자신의 탑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유고슬라비아 점령군에게 알바니아 땅이 쉽게 정복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1981년 5월 13일은 유고슬라비아 민병대 창립 기념일이었고, 세르비아 비밀 경찰 UDB는 이 날 타히르 메하를 생포함으로써 승리를 자축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타히르 메하와 그의 노부의 총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들의 영웅적인 저항으로 인해 세르비아 점령군은 드레니차 전장에서 막대한 군사 장비와 수천 명의 군인 및 민병대를 동원해야 했다. 탱크와 헬리콥터까지 동원된 대대적인 작전이 펼쳐졌지만, 타히르와 그의 아버지는 끝까지 저항했다.
타히르와 그의 아버지는 무려 20시간 동안 군사 장비와 맞서 싸웠다. 타히르는 싸우는 동안 "오, 나의 알바니아여, 네가 끝났다고 말하지 마라!"라고 노래하며 싸웠고, 그 노래는 마치 총알처럼 적들을 쓰러뜨렸다.
이 전투는 당시 유고슬라비아에 가해진 가장 큰 타격 중 하나였다. 타히르 메하와 그의 아버지는 세르비아 침략자들의 군사 전략과 도덕적 가면을 벗겨냈으며,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시스템의 '평등'이라는 가식을 무너뜨렸다. 타히르의 저항은 알바니아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고, 세르비아 침략자들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게 했다.
타히르 메하의 총성은 5월 13일을 침략자들에게는 패배의 날로, 알바니아인들에게는 자유와 용기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는 명예나 명성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과 명성, 노래와 역사는 그의 탑집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났다.
타히르의 할아버지 에민 라티는 아젬 베이타의 전우였고, 그의 아버지 네비는 샤반 팔루자와 함께 싸웠으며, 타히르의 형제 베키르는 코소보 해방군(KLA)의 일원이 되어 조국을 위한 자유의 순교자가 되었다.
자샤리 가문 - 자유의 성전
6 세대 전에, 자샤리, 메하, 카드리우 세 형제는 드레니차의 프레카즈에 세 개의 마을을 만들었다. 이 마을은 민족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마을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형제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된 자샤리 가문은, 1998년 3월 5일 이후 알바니아인들이 사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그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코소보의 자유를 향한 길을 연 가문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 가문은 4세대, 5세대, 6세대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 동안 꿈꿔온 자유를 상징하게 될 것이며, 지혜로운 노인이었고 산악 해방의 스승이었던 샤반 자샤리는 그의 아들 함자와 아뎀, 그리고 손주들과 함께 피로써 프레카즈에 코소보 자유의 탄생지를 세웠다. 자샤리 가문이 나라의 역사에 남긴 모든 영예와 애국심 속에서, 아뎀 자샤리는 새로운 민족 역사를 시작하는 핵심 인물이 될 것이다.
자샤리 가문 1 세대의 세 아들 중, 셋째 아들 무라트가 전설적인 지휘관 아뎀 자샤리의 조상이다. 이후 자샤리 가문은 파즐리우, 무라티, 샤반이 이어졌으며, 리팟, 함자, 그리고 아뎀이 태어났다. 샤반 자샤리의 아들들은 자샤리 가문의 5대손이며, 리팟, 함자, 아뎀 세 형제는 6대손에 해당한다.
무라트라는 이름은 자샤리 가문의 여섯 세대에 걸쳐 세 번이나 이어졌다. 무라트는 동생을 대신해 리틀 플레메에서 군 복무를 하러 갔고, 그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무라트는 오직 한 명의 아들 파즐리를 남겼는데, 파즐리는 명예롭게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다. 파즐리 역시 그의 아버지처럼 오직 한 명의 상속자를 두었고, 그 상속자는 그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무라트'라 불렀다. (이 무라트는 전설적인 지휘관 아뎀 자샤리의 할아버지이다.)
무라트는 그 후손들처럼 같은 운명을 따랐다. 그에게도 오직 한 아들 샤반이 있었고, 샤반은 자히데와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리팟, 함자, 아뎀 세 아들과 다섯 딸 하바, 질라, 조야, 카밀레, 할리메를 두었다.
<번역: 양금희 전(前) 제주국제대학교 특임교수>
1) Prof. Dr. Muhamet Pirraku /Tahir Meha’s gun opened the way of freedom/ 2007
2) Mehmet Bislimi /This is called Drenica/ Monograph,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