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2022.12. 프로야구 스포츠서울 올해의 상 시상식 올해의 공로상
지금 목동야구장에는 한창 '제79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다. 매년 청룡기 대회가 열릴 때마다 1977년 대구상고 시절을 잊을 수가 없다. 요즈음도 가끔 아내와 서울 갈 때면 예전 나의 젊은 시절에 온 몸을 다 바쳐 경기했던 동대문야구장을 생각하곤 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동대문야구장이 지금은 터만 있을 뿐 현대식 건물들로 들어섰다. 오랜 세월을 동대문야구장과 함께 했고 이제 70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아쉬움을 지을 수가 없다. 수십만 아니 수백만 넘는 사람들이 지금 자녀들의 손을 잡고 아빠의 젊은 시절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해도 동대문야구장은 없다. 자녀들에게 "그 당시 아빠들은 모교를 위해 친구들과 서로 어깨에 손을 얹고 목이 터져라 소리지르고 열광했다"고 이야기 할 수가 없다. 대한민국의 나이 든 오빠와 누나들은 추억의 장소로 동대문야구장을 기억하면서 그 당시 고교야구의 열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추억의 동대문야구장을 몇 사람의 이익 때문에 버렸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역사가 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없으면 대한민국도 없는 것이다. 이제 동대문야구장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없다.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모교를 위해 학교 공부를 빠져 먹으면서 목이 터져라 응원하기 위해 친구들과 동대문야구장을 갔단다"는 말은 아려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다.
어제(7일) 이른 아침시간에 최홍섭 주간조선 객원기자가 '청룡기 고교야구 50년 관전평'이란 제목으로 길게 칼럼을 썼다. 너무 반가운 기사라 그 자리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번에 다 읽었다. 최홍섭 객원기자가 올린 메인 사진을 보니 1977년 제32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내가 우승한 장면이다.
지금도 7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 때의 감격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어렵게 패전부활전을 거쳐 감격의 우승을 했으니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러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벌써 5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해 흥분이 되곤 한다. 그 당시 선발투수인 박영진 선수가 연일 역투하는 바람에 결승전에 올라가서는 마운드에서 코피를 흘렸고 휴지로 코를 틀어막고 9회까지 끝까지 던진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에 우리는 개인을 위한 플레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학교의 명예를 걸고 몸이 아파도 아프다는 이야기 하지 못하고 이빨을 악물고 던지고 치고 달렸던 시절이다. 지금 MZ 세대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모두가 그렇게 야구를 했다.
(요즘 MZ세대는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프로야구 출범 직전인 1981년까지의 고교야구 인기는 광적이었다. 동대문운동장은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와 비슷한 열기가 매일 이어졌다. 애교심(愛校心)과 애향심(愛鄕心)은 불타올랐다. 특히 청룡기는 종종 패자부활전을 도입하면서, 자칫 1패만 하면 허무하게 탈락하는 토너먼트의 단점을 보완하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고교야구의 인기는 시들어 갔다. 특히 2011년 주말리그, 2014년 투구 수 제한 등이 속속 도입되면서 고교야구의 재미는 사라졌다. 장소는 목동야구장으로 옮겨졌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야간경기는 힘들게 되었다. 결승전이 열려도 학교 관계자나 학부형만 참석했다. 지금의 고교야구는 그저 프로팀의 지명을 받기 위한 테스트 장으로 변질되었다. 대략 2000년 정도까지는 에이스가 일상적으로 완투나 완봉을 했는데, 지금은 완투 한 번 못 해본 나약한 투수들이 프로로 진출한다. 그러니 한국 프로야구의 인기는 높은데도 일본과의 수준 격차는 갈수록 벌어진다. 일본 고교야구인 고시엔(甲子園)대회가 프로야구 못지 않은 인기를 계속 누리는 비결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1977년(제32회)의 스타는 대구상고의 '헐크' 포수 이만수였다. 그는 1975년 1학년 때 청룡기 대회 1호 홈런을 치면서 일찍부터 거포로 명성을 떨쳤다. 대구상고는 승자준결승전에서 동산고에 1대2로 석패하면서 패자부활전으로 내려갔다. 패자결승전에서 광주일고를 11대3으로 대파하고 결승전에 올라갔다. 정상에서 기다리며 한 번만 이기면 우승하는 동산고를 상대로 1차전에서 3대1로 승리하고, 여세를 몰아 최종결승전인 2차전은 7대2로 대파했다. 대구상고 박영진 투수는 5일 연속 등판하며 우수투수상을 받았고, 이만수는 최우수선수상·타격상·최다안타상·타점상 등 4관왕에 올랐다. 요즘 동남아 야구선교와 야구 관련 사회봉사에 헌신하고 있는 이만수는 지난 6월10일 제2회 이만수배 발달장애인 티볼야구대회에서 66세의 나이에 직접 홈런 시타를 보여 주기도 했다.
이렇게 청룡기 고교야구의 빛나는 역사는 곧 한국야구 발전의 역사다. 특히 청룡기는 '배움의 야구'를 이어 온 대회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뒤 예절을 갖추고 서로에게 인사한다. 청룡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승리보다 더 중요한 스포츠맨십을 배웠다"고 말한다. '청룡의 해'를 맞아 모두 57개팀이 참가한 가운데 7월 초부터 목동야구장에서 열리고 있는 제79회 대회에서도 같은 목소리를 기대한다.) (펌: 최홍섭 주간조선 객원기자 기사에서)
7월7일 이른 아침에 최홍섭 객원기자가 쓴 기사로 인해 과거가 잠시 오버랩 되면서 철없던 고교생으로 되돌아가 보았다. 인생을 살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젊은 시절의 많은 추억은 나이가 들어서도 나를 풍성하게 해준다. 거기에는 좋은 일도,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런 추억들로 인해 나는 요즈음 날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