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시적 의미 찾아내는 능력이 시 쓰는 수준 결정"
이어산 "시적 의미 찾아내는 능력이 시 쓰는 수준 결정"
  • 뉴스N제주
  • 승인 2019.06.2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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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칼럼(43)토요 시 창작 강좌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시 창작 강좌(43)

□영화로 시 읽기

재미있다고 소문난 영화는 대부분 반전이 있어서 관객의 허를 찌르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감흥이 묻어나는 특징이 있다.

특히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일수록 시각적 은유와 진술을 차용하여 입체적으로 주제를 전달한다. 이 제작 기법은 현대시가 추구하는 시 작법과 많이 닮아 있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들은 시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결국 잘 만들어졌다는 영화들은 작품성이 뛰어난 시처럼 은유와 진술, 중층묘사가 있다. 그래서 시인은 영화를 보면 안 된다.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시적 구조가 뛰어날수록 좋은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를 읽으면서 그 함축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시안(詩眼)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실 세계에서나 영화에서나 시적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이 시를 쓰는 수준을 결정한다. 좋은 시 한 편에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도 남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사람살이의 한 토막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야기의 확장성이 크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다음의 시 한 편을 보자.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 하고 지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안 그냐.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잔 혔다
   지랄 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
   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 이지엽, <해남에서 온 편지> 전문

시를사랑하는사람들 표지
시를사랑하는사람들 통권 100호 기념 표지

이 시는 마흔이 넘어서 낳은 막내딸이 수녀가 되겠다며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불교집안에서 수녀가 웬 말이냐며 못마땅해 하던, 그러나 이젠 하늘나라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홀로 남은 어머니, 꽃을 좋아하는 그 어미의 딸에 대한 절절한 보고픔에 목이 메는 짠한 내용을 시에 담고 있어서 감동을 주고 있다.

그 위에 징한 전라도 지역말로 써 내려간 이야기가 시의 맛을 더하고 있다. 간단한 이야기 같으면서도 이 시는 살아있는 현장감과 영화 한 편을 거뜬히 만들 수도 있는 내용의 확장성이 있다.

이 시를 쓴 이지엽 시인(한국시조시인 협회 이사장/경기대교수)은 '오늘의 시조시인 전국 세미나' 참석차 제주에 온 김에 필자의 집에서 하루 묵게 되었는데 마침 제주탐라문학회 몇몇 동인들도 함께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 후 이지엽 시인은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직접 낭송하기도 했는데 자기의 제자가 수녀가 되고 그 어머니는 애절하지만 딸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삶의 현장을 목격하고는 이 시를 썼다고 했다. 이 시는 사설시조다. 종장이 없었다면 현대 서정시로 착각할 정도다.

이처럼 현대시와 사설시조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고 시 한 편으로도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사연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펼치면 영화가 되고 축약하면 위와 같은 시가 될 수 있는 진술이 있는 시가 좋은 시다. 이런 힘을 기르도록 영화도 사물도 자주 읽자.

- 이어산, <생명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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