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시쓰기는 사물에 말을 걸고 꼬투리 잡는 일"
이어산 "시쓰기는 사물에 말을 걸고 꼬투리 잡는 일"
  • 뉴스N제주
  • 승인 2019.06.2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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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칼럼(42)토요 시 창작 강좌
이어산 시인. 평론가
제주본태박물관 연못(사진=이어산)
제주본태박물관 연못(사진=이어산)

■ 토요 시 창작 강좌(42)

□시 쓰기와 사물의 꼬투리 잡기

시를 쓴다는 것은 사물에게 말을 걸고 꼬투리를 잡는 일이기도 하다. 시의 대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잡아야 할 꼬투리는 무궁무진하다. 오늘부터라도 당신은 사물에 시적 꼬투리를 잡아보라.

그러면 그 대상은 귀찮아서도 당신에게 자신의 본질적인 것을 드러내거나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남이 먼저 본 것, 이미 알려진 것이 아니라 조그맣고 하찮은 것에서도 잡아낼 꼬투리가 많고 감춰진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한밤중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그녀의 울음은 베란다를 넘지 못한다
   나는 그녀처럼 헤픈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녀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녀의 몸 속엔
   그렇고 그런 싸구려 내용물들이
   진설되어 있다 그녀가 하루 24시간
   노동을 쉰 적은 없다 사시사철
   그렁그렁 가래를 끓는 여자
   언젠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살진 소파에 앉아 자정 너머의 TV를
   노려보던 한 사내가 일어나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로 간다
   그녀 몸속에 두꺼운 손을 집어 넣는다
   함부로 이곳저곳을 더듬고 주물러댄다

   - 이재무, <냉장고>전문

위 시는 냉장고에서 잡은 꼬투리다. 냉장고는 시인에게 시적 꼬투리를 잡혀서 마침내는 한밤중에 지치고 아파서 낮은 신음으로 울고있는 여자로, 속을 다 드러내 보여야만 하는 그 헤픈 모습을 보이고 만다.

그것은 24시간 노동을 해야할 만큼 고된 삶일 수 밖에 없는 서민의 삶으로 전이 되고 "그렁그렁 가래를 끓는" 여자로 냉장고와의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맨날 집에서 빈둥댄 듯 "살진 소파에 앉아 자정 너머의 TV를/노려보던 한 사내가 일어나/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로 간다" 그러고는 "그녀 몸속에 두꺼운 손을 집어 넣는다/함부로 이곳저곳을 더듬고 주물러댄다"고 한다.

냉장고에서 잡은 꼬투리는 이렇게 아프고 힘든 현실의 여자로 옮겨져서 시적 확장성과 울림을 주고 있다.

저 폭포는 나의 안으로 쏟아져 폭발한다. 모든 밖이 나의 안이다. 모든 안이, 나의 상처다. 가파른 절벽의 무지개로 갈리는 솟구치는 마음의 우레.

-  이하석, <명금폭포> 전문

시조의 리듬으로 산문시 형태로 쓴 이 시는 폭포에서 잡은 꼬투리다. "폭포는 나의 안으로 쏟아져 폭발 한다" "모든 밖이 나의 안"이기 때문이란다.

세상에서 받은 수 많은 상처, "가파른 절벽"에서 갈라지는 무지개. 그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외침처럼 들린다. 얼마나 그 마음의 소리가 큰지 천둥소리처럼 들린다고 한다.

쏟아지는 폭포에서도 이처럼 꼬투리를 잡아내어 그 소리를 함께 듣다가 그 속으로 빠지다가 절망하다가 절벽의 끝에서 마침내는 소멸되지 않고 무지개로 솟아나는 것, 이것이 생명의 시학이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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