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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여성들, 왜 병역을 거부하는가?
[영상]여성들, 왜 병역을 거부하는가?
  • 오형석 기자
  • 승인 2019.05.14 15:33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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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0515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여성들 병역거부, 평화시민으로서 병역거부를 한다" 대담 사진

▲평화시민으로서 병역거부를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만출신이고 제주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평화시민 왕유쉔이라고 합니다. 제주에 살아온 9년 동안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현장활동을 하며 평화의 문화를 만드는 일도 연습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제가 병역거부를 하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나누며 함께 참여하시는 친구들을 통해서 병역거부의 여정에 내딛어보겠습니다.

저는 여성으로서 병역거부를 한다는 것보다 처음에 자기소개 할 때 이야기 했던 평화시민으로서 한다는 것이 더 가까운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일단 이분법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정체성을 나누는 일은 다양성을 묵살 시키는 일인 것 같아서 딱히 여성으로서 한다는 것은 저에게 좀 맞지 않은 틀 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실제로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이런 이분법을 적용해 남성과 여성을 구분합니다.

따라서 대만과 한국에서 모두 실시 되는 징병제도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분법으로 나눠진 생물학적인 여성은 징병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대상조차 아님으로 거부하는 권리도 오랫동안 인식되지 못 해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병역거부를 하는 행동과 운동에서 생물학적인 여성 그리고 이분법으로 나타내기 어려운 다양한 정체성을 갖진 자들이 함께 해왔다고 보지만 주체성을 선명하게 나타내지는 못하거나 주체성을 잃은 채로 (예를 들어 지지하는 자나 동참하는 자로서) 역할을 해왔을 수도 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법으로 나눠진 사회에서 징병대상이 아닌 생물학적 여성으로서만 해도 병역거부를 할 수 있는 당사자라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틀을 떠나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함께 했으면 합니다. 저는 “평화시민”의 정체성으로 병역거부 선언을 준비했습니다.

이 병역거부 행동을 통해 이분법으로 나눠진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에게 그리고 다른 다양성을 가진 소중한 존재들에게 모두 평등하지 않고 고통을 주는 이 구조를 거부합니다.

“남자가 만든 전쟁에서 여자가 희생자가 된 이미지”에서 꼭 벗어나고 싶습니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 “울지마, 남자인데…”,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인간이 되지” 같은 말들은 많은 사람 심지어 여성의 입에서도 나오는 흔한 말입니다.

이 작은 폭력을 전쟁의 씨앗이라고 봅니다. 전쟁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는 이분법으로만 보기가 어렵습니다. 전쟁의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고 전쟁에서 그리고 전쟁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 모두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이분법적인 사회에서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 그리고 다른 다양성을 가진 존재들에게 부당하게 사회적인 역할과 기대를 강요하는 구조에서 그런 역할과 기대에 맞춰서 살아남기에 모두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을 것이라는 것을 함께 인정을 하고 애통해하며 치유하고 싶다는 마음을 병역거부 선언을 통해서 전합니다.

이제 저의 정체성이라고 표현한 평화시민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제가 만든 평화시민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예를 들어 어느 나라 사람이다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살며 감수성과 상상력 그리고 창조력으로 흔들리는 정체성을 가꾸며 폭력을 변혁시키는 노력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 정체성의 이름과 정의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고 제가 저의 병역거부 선언을 쓰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보석 같은 깨달음들을 정리해서 만든 것입니다. 병역거부를 하는데 이렇게 애를 써서 정체성의 이야기 하는 이유는 권력자들에게 정체성을 만드는 권력을 양도하는 것은 군사주의를 키워가는 양분이 될 거라고 생각 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들이 만든 정체성의 틀에 산다는 것은 군사주의와 함께 하는 승리자의 역사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승리자의 역사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이 지워지게 되고 영웅과 적을 세우게 됩니다.

승리자의 역사로 국가공동체를 세우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에 맞는 흔들리지 않은 정체성의 틀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기 위한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만 막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픔도 말하지 못하게 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게 막아버리게 됩니다. 혹은 그 정체성의 틀에 딱 맞는 선택적인 아픔을 공유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아픔이 나눠지지 않게 되면 정체성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 얼어버린 현상은 세대 이어가는 (역사의) 트라우마가 됩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며 군사주의를 합리화 시킬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나라와 국경이 계속 바뀌어도 군사주의에게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게 되었지요. 그 힘은 우리가 양도 해주는 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역사의 트라우마에서 회복되지 못한 채 인간으로서 필요로 하는 안전함을 추구하는 방식도 지속적으로 군사주의와 국가안보를 의지 하게 합니다.

국가안보는 국민 조차도 못 지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안전을 추구하는 일을 특권화 시키며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구조라고 봅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며 환경과 사람을 희생을 시킵니다. 국가안보는 국민을 지킨다고 치더라도 국민만 지키는 국가안보라서 국경 안에서 다양한 이유로 정착하고 있는 다양한 존재들을 묵살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국경 밖으로 나가 있는 국민은 더욱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정체성의 틀에만 살아가려는 것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폭력적으로 인간사회를 부자연스럽게 찢어버린 일이라고 본다. 국가와 국가안보는 흔들릴 수 없고 흔들리게 되면, 국민이라고 여길 때 국가안보 범죄자로 죄를 물을 것이고 국민이 아니라면 아에 정착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을 수 도 있습니다.

저는 평화시민으로 살기 위해서 제주에서 군사주의에 저항하고 폭력을 변혁시키는 실천을 하다가 입국거부를 당했습니다. 저에게 단 한 번의 조사와 재판도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유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상태로 이 땅에 정착했는지 한마디도 묻지 않았고 저를 그냥 국경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유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입국거부가 중지된 것도 한마디 해주지 않았습니다. 언제 또 다시 그럴 수 있는지도 당연히 말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비국민인 제가 당한 “국가안보”의 경험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전쟁으로 인해서 예멘친구들이 한국에 들어온 것을 반대하는 집회에서 “국민이 먼저다”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외칩니다. 그 말은 국적으로 다양성을 품은 공동체를 찢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딸은 한국국적이지만 저는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서 살아야 ‘우리 모두 다 먼저’라고 여겨질 수가 있을까요? 어느 나라 군대도 다양성을 지킬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의 국가안보도 우리에게 안전함을 주지 못합니다. 국민과 같은 흔들리지 않은 정체성, 군사주의와 국가안보 자체가 우리 가정에게만 아니라 평화를 생각하든 말든 간에 틀에 맞게 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서 군사주의와 함께 공생하는 흔들리지 않은 정체성을 흔들어보며 다양한 아픔을 공감하며 자기다움을 외치는 다양한 정체성과 만남으로서 사랑하며 군사주의로 인해 끊겨진 세상과 재연결 하고자 한 평화시민으로서 병역거부를 선언 합니다.

마지막으로 군사주의에 저항하는데 왜 꼭 병역거부를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자면, 오랫동안 군사기지를 저항하는 현장에서 활동한 경험에서 받게 된 선물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군사기지에 오가고 있는 군인들은 저와 같은 선한 마음 갖기도 하고 실수 하기도 한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외면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함께 군사주의를 저항해온 동료들까지 징병제도 때문에 잠깐 우리가 저항 하고 있는 군사기지에 들어가서 군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군사주의를 저항하는 자까지도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데에 어떤 특정그룹의 책임만 물으려고 하면 여기까지 되어버린 많은 고통과 책임들을 외면 하는 행동 같이 느껴집니다. 실은 징병제 역시 이 사회가 겪은 고통에 반응하는 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함께 그 고통과 책임을 나누자는 노력 같이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은 고통을 더 악화시킬 수 밖에 없는 구조라서 고통을 나누는 방식에 대해서 변혁을 주어야 하는 생각입니다.

군사기지는 군인들이 닫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함께 닫게 해야 하는 것이고 군사기지 안에 서있는 군인들에게 총을 내려라 말하기 전에는 제가 먼저 총을 내려야 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제 손에 실제적으로 총을 들고 있지는 않지만 제가 그 폭력의 구조를 깨지 않은 의상 제가 바로 그 사람에게 총을 들게 만든 사람중의 한 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병역거부 선언으로 무기를 내리겠습니다.

이 병역거부 선언문을 쓰게 만드는 여정에서 많은 영향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군복무 아닌 평화복무의 꿈을 꾸는 친구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군사기지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 활동가, 현지주민, 새로운 정착자, 군인, 경찰, 공무원, 노동자,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등 다양한 존재들에게 감사 드리고 싶습니다.

나눠진 아픔들이 저를 행동하게 만든 용기가 되었습니다. 또 평화시민으로서 살게 된 과정에서 나의 감수성, 상상력과 창조력을 깨워주신 많은 친구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최성희 병역 거부 선언 (2019. 5, 14)

왜 나는 ‘병역 거부 선언’을 하는가?

나, 최성희는 50 대 여성 이며 제주 도민이다. 제주 강정 마을에서 제주해군기지와 제주의 군사화를 반대하며10년 가까이 살고 있다. 나는 오늘 여성으로서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인 ‘병역’을 거부하는 선언을 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그 것은 한 체계의 발견이다. 가부장제와 군사주의.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안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무찔러야 할 사람들이 있고 그 들은 우리의 적이다. 우리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하고 그 힘은 군사력이다. 남성들은 병역의 의무를 지니고 있고 여성들은 그 남성들을 ‘보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남성, 여성 모두가 체재의 유지와 재생산에 ‘복무’하도록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안보이데올로기를 주입 받는다.

남성들이 군대에 가는 것이 당연시되고 학교에서 받는 군대식 교육은 지금도 후세대로 ‘계승’ 된다. 군대를 가지 않거나 군사훈련을 거부하는 남성은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처벌’을 받아 왔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공모’의 관계에 놓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공모’에 있음을 깨닫기 까지, 자신이 사회 통제 체제의 분열과 집산의 ‘도구’로 쓰이고 있음을 깨닫기 까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만큼 이 체계는 강력하고 총체적이다. ‘체질화’ 된 지배자들의 언어를 떨치고 일어나는 것은 또한 위험하기도 하다. 이 모두에도 불구하고 체제 내에서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은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오랫동안, 50 대 중반이 되도록 병역 거부 이슈는 ‘나의 이슈’ 가 아니었다. 나 자신을 보면 이 체계는 여성이 병역 거부 이슈를 자신의 이슈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성공한 편이다. 내가 여성으로서 병역 거부 선언을 하게 된 것. 그것은 질문을 하지 않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체제 유지와 재생산을 돕는 나의 ‘공모’에 대한 질문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것이 어떠한 결과들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질문 때문이다. 왜 병역 거부인가? 왜 선언인가? 그것은 병역이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의 유지와 재생산 체계 에서 핵심적 기제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병역 거부 이슈는 본질적으로 여성 들의 이슈이며 여성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체계에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사안 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선언이란 공적인 형식은 공유를 전제로 한다. 선언의 배경과 목적이 한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환기시키고 호소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나의 선언은 이 사회를 향한 질문이다.

질문을 하게 만든 여러 계기들이 있다. 무엇보다 동료 남성들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목도하며 이 것이 과연 여성들이 외면하거나 관심을 가지는 것에서 그칠 일 인가에 대한 질문이 있다. 연대를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있다.

또한 전쟁 없는 세상 등 적극적으로 병역 거부 활동을 지지하고 타국과 국내 여성들의 병역 거부 선언을 소개한 여성 평화 활동가들의 활동도 고무적이었다. 작년에 터키, 이스라엘 그리고 한국 여성들의 병역 거부 선언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들의 선언문을 접했다.

이러한 선례와 기록들은 병역 거부 이슈가 여성들의 이슈가 되는 것의 필요와 그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그러한 선례와 기록들을 공유하며 ‘같이,’ ‘함께’ 해야 할 필요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도움을 준 남성동료들의 헌신이 있다.

그리고 나는 세 가지의 역사적 계기를 꼽고 싶다.

첫 번째는 1947-1954년 제주 4·3 당시 학살과 1980년 광주 학살을 포함 해방 이후 남한에서 벌어진 수 많은 사건 에서 자국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그들을 학살한 집단이 한국군 이라는 사실이다. 국가와 군대가 국민을 지켜준다는 믿음이 이보다 자명하게 무너져 내린 때가 또 있었던가

두번째는 1960년 대 -70년대 베트남에 대한 전쟁 시 베트남 민중들에 대한 한국군의 학살이다. 이것이 한국인에 의해 처음 폭로된 것은 2000년 대 초다. ‘민족’ 개념의 한계는 여지 없이 폭로되었다.

세 번째는 2018년 10월 강정에서 강행된 이른바 ‘국제 관함식’ (제국주의의 산물로서 군사주의의 과시) 이다. 그 날 문재인 대통령은 미 핵항모 로널드 레이건 포함, 40여척의 국내외 군함의 사열을 받으며 평화는 군사력에서 나옴을 역설했다. 그리고 강정은 순식간에 그러한 국가와 국가원수의 지론을 강행하기 위한 작전으로 포위되었고 주민들과 시민들은 ‘평화는 군사력’ 이라는 프레임의 포위에서 탄압 받는 자신들을 발견하였다.

군대는 관함식 기간 동안 많은 어린이들이 군사 체험을 하도록 프로그램들을 또한 기획하였다. 군사주의 문화는 한 인간이 어릴 때부터 군사주의 내면화 교육을 시킨다. 이는 제국주의의 충실한 부속품이 되는 과정이다.

군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이 계기 들 에도 불구, 이 것이 군대, 군대 문화, 군사주의, 그리고 성별을 막론한 개개인의 병역거부 선언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모든 군대가 나쁜 것은 아니야, 착한 군인도 있고 나쁜 군인도 있어’ 라는 인식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착한 군인, 나쁜 군인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개개인들이 복무하도록 강요하는 이 사회의 시스템은 어떻게 유지, 재생산되는가 이다.

내가 사는 강정마을은 12년 째 제주해군기지를 반대하고 있다. 제주해군기지는 ‘국가 시책’의 이름으로 들어왔다. 해군과 국가는 ‘안보’의 이름으로 주민의 주체적 결정권을 박탈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함으로써 제주해군기지 유치를 가능하게 했다. 그 것은 자연에 대한 학살과 부당한 재산권 탈취와 가혹한 사법적 탄압을 동반한 것이다. 국가는 또 한번 공군기지로 쓰일 우려를 안고 있는 제주 제 2공항 건설을 강행하고 있다.

도민들의 생존권과 주체적 결정권은 다시 한 번 묵살되고 제 2 공항 연계 도로인 비자림로에서는 다시 한번 동식물들이 학살되거나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디. 국가와 군대는 과연 국민을 지키기 위한 것인가. 국가와 군대는 과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인가. 침략적으로 지어진 기지는 안보를 위한 것인가. 또다른 침략을 위한 것인가. 일제시대 병참기지로 쓰여 중국 침공에 가담하게 된 제주의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의 한 결론은 그 제국주의 시스템의 부속품으로서 시스템을 공고히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당사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부속품이 그 거대한 설비에서 튕겨 튀어나오지 않는 한 그 설비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의 병역거부 선언은 바로 그 튕겨 나온 부속품으로서 의 선언이다. 나는 가부장제와 군사주의 체계의 유지, 재생산을 공고히 하는 병역 체계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그러한 ‘당사자’ 로서 거부한다.

나는 선언한다.

_ 나는 모든 생명들이 동등하게 주체로서 존중되는 사회를 꿈꾼다. 군사주의는 가부장제의 최악의 형태이며 차별에 바탕을 둔 분열과 지배를 통해서 작동한다. 군사주의는 제국주의를 존속하게 하는 중추적 장치이다. 또한 군대 내 성차별, 성폭력은 군사주의의 한 양상으로서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군사주의와 그 군사주의를 유지하게 하는 병역을 거부한다. 군사주의의 양상들인 모든 전쟁과 전쟁 훈련과 전쟁 쇼를 거부한다. 군사주의와 병역은 생명에 대한 폭력, 민주주의에 대한 폭력 이다.

_ 나는 모든 어린이들이 제국주의를 내면화하는 군사주의 체험과 교육 대신 생명을 존중하고 정의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가지길 바란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약속과 제도가 시민의 힘으로 구축되길 촉구한다.

참조로 유엔아동권리 협약 38조 2항은 “당사국은 15세에 달하지 아니한 자가 적대행위에 직접 참여하지 아니할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실행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 협약에는 모든 당사국이 이 협약을 성인과 아동 모두에게 적극적으로 알릴 것을 권고하는 조항이 있다.

_ 나는 더 많은 여성들을 포함, 시민들의 병역 거부 선언을 지지하고 촉구한다. 나는 여성들의, 그리고 병역의 의무를 직접적으로 지지 않더라도 자신이 한 당사자라고 생각하는 많은 시민들의 그러한 흐름이 궁극적으로 평화를 가져 오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를 갖고 있다. 현재 동북아와 중동에서 군사주의로 인한 긴장이 격화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많은 어린이들이, 많은 생명들이 학살되고 있다. 우리의 선언은 생명을 구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작은 파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나는 병역을 거부합니다

내 이름은 멸치입니다. 그리고 엄문희 입니다.

강정마을로 내 삶을 옮기고자 마음먹고 내가 나에게 준 이름이 ‘멸치’입니다. 2015년 겨울부터 아이들과 강정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먹던 음식을 삼키지 못한 채 1년 뒤 강정에 왔습니다. 4.16 때문에 강정을 살게 됐습니다. 더는 내가 사는 세계의 문제를 모르는 것처럼 피해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그때 그곳에 있었습니다. 8살 아이였습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에 던졌던 질문을 기억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돼서야 그때 내가 본 일이 어떤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한 번도 1980년 5월과 떨어져 살 수 없게 됐습니다.

제주에 살면서, 강정마을 주민으로 4.3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4.3들’을 만났습니다. 개인으로서 만나기 힘든 국가를 매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질문한다는 이유로 비국민으로 내몰리고, 주민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그 시간을 겪으며 나에게 남은 이름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일의 당사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세계시민의 책무성을 알았습니다.

지금 내가 병역의 당사자로서 동원을 거부하는 동기엔 무엇보다 이 세계가 안전하지 않다는 자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 위기에 대한 각성이지만 그 전쟁이란 것이 무시로 내 일상에 파고드는 모든 일이 된다면 우리는 ‘병역’이란 말을 다시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확인하고 경계할 것 가운데는 우리가 일상의 보편 언어로 획득하고 싶은 ‘평화’와 그 실천의 이름으로서 ’병역거부‘가 과연 새로운 언어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름들을 낯설어하는 이유에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검열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가 도달하려는 곳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권력이 내놓지 않는 언어, 권력이 허가하지 않는 언어를 기억하고자 합니다.

나는 여성입니다. 나는 제주 사람입니다. 나는 강정 주민입니다. 나는 내가 겪는 모든 일의 당사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나의 정체성은 주류 권력으로부터 간단히 거부당했습니다. 단, 여성인 것만 빼놓고.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됐는지 묻기로 했습니다. 나는 ‘질문’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나에게 여성으로서 병역을 거부한다는 일은 이 사회에 던지는 선언이면서 동시에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병역을 거부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습니다. 내가 여성인 이유로 병역의 당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그 문제를 논의할 아니 최소한 사고할 권리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여성은 전쟁을 말할 권리도, 그 전쟁에 동원되지 않겠다는 말도 할 자격이 없는, 전쟁과 아무런 상관없는 존재가 맞습니까?

여성이 병역에 관해 당사자에서 분리되고, 어떠한 목소리도 낼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전쟁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여성이 병역의 당사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내가 여성으로서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여성을 아예 논의의 당사자에서 배제하는 것, 여성을 약자로 상정하는 것, 희생자화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군사주의적 발상입니다. 여성이 전쟁 당사자, 병역 당사자가 아니라는 인식은 전쟁과 폭력의 본질을 은폐합니다. 이것이 가부장 권력과 주류 전쟁 권력이 그간 여성을 착취하고 동원한 방식입니다. 혐오를 재생산하고 여성을 논의 주체에서 제외하기 위해 권력이 요구하는 성 역할과 지위만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여성으로서 내가 병역을 거부하는 일은, 어떻게든 대상화시키려는 기존 권력에 저항해 주체가 되려는 행위입니다.

제주도청 앞 천막촌 사람으로, 제주 해군기지 준공 이후를 살아가는 강정 주민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에 ‘질문’하는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대체 어떤 과거를 가졌기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는지 밝혀내고 그것이 더는 연장되지 않게 지금 여기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가 바라는 그 미래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과거란, 일상의 장치와 구조에 숨어 있는 ‘폭력’이었습니다. 폭력인 줄도 모르고 협력해온 나 자신이었습니다. 일상에 파고든 전쟁이었습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거대한 국가와 마주하는 삶, 강정의 삶은 질문하는 삶이었습니다. 강정에서 만난 국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만나고 싶었고, 만나서 묻고 듣길 원했으나 국가와 군대는 우리의 질문을 받지 않았습니다.

질문받지 않을 수 있는 권력, 질문을 무시하는 힘, 질문하는 존재를 지울 수 있는 존재, 그것이 폭력이었습니다. 구럼비 박탈은 단일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강정에서 작년 가을에 열렸던 국제관함식 역시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혐오의 정치’와 ‘희생의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물이었습니다. 마을을 깨뜨리고 들어온 핵 함선보다 두려운 것은 ‘안보’라는 간판만 쓰면 어떤 일도 묵인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수 특권층이 안보이슈를 독점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위한 그 어떤 논의에도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논의의 주체도 못되면서 폭력에 가담했습니다. 폭력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재에서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타클로 소비해버린 일이 나에게도 있었습니다. 나 역시 폭력의 가해자였던 순간이 많았습니다.

나의 권리가 누군가의 착취를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전쟁의 당위를 극대화한 일상의 위협은 이미 상시화되었고, 인간의 일상 감각과 인식 틀을 바꿔놓았습니다. 전장에 나타난 국가 간 전투력의 대결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유형무형의 자원 전체가 이미 전쟁의 이해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나 역시 다양한 모습으로 그 일에 동원되었습니다. 폭력인 줄도 모르고 협력했습니다.

폭력에 동원됐습니다. 효율을 위해 단번에 배제되는 존재로, 마땅히 누려야 할 인간 존엄도 의심받는 성 소수자로, 최소한의 안전도 담보되지 않은 현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신자유주의의 온갖 실험에 희생되는 세대로, 국가권력에 굴복할 선량한 시민화 교육의 장에서 그 학생으로 우리는 이미 동원되고 있습니다. 혐오를 재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역이 총을 들고 군사훈련에 동원되고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말해야 합니다. 폭력의 구조, 폭력의 정당성을 위해 동원되는 일상의 시스템이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병역거부는 군대 징집에 반대하는 남성들만의 싸움으로 둘 수 없습니다. 군대 밖 일상을 지배하는 군사주의에 맞선 우리 모두의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제주 구좌읍 송당리 비자림로 숲을 가면 학살 중인 숲을 만납니다. 그 숲 안으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붉은 선’이 어떤 세계를 동강 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무들은 어떤 날 동시에 이곳에 줄 맞춰 심어졌다가 다시 인간의 욕망으로 한날한시에 죽게 됐습니다. 나무들에만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일은 나에게도,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일을 학살로 인지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에는 석탄이 묻어있지 않습니다.

전기를 생산하다 죽은 비정규직 젊은 노동자의 피도 묻어있지 않습니다. 주민이라는 이름이 국가가 국책사업 때만 주는 자격의 이름이란 것도 몰랐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은폐는 모든 존재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전쟁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학살 아니면 어떤 이름을 쓸 수 있겠습니까? 나는 지금 여기를 사는 제주 여성으로서 이 섬에서 여전히 벌어지는 모든 종류의 학살을 거부합니다.

지금도 제주도청 앞 천막촌에선 시민들이 공공의 폭력에 질문하고 있습니다. 비자림로 숲에 나무들을 껴안고 함께 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강정은 4.3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광경 너머의 진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병역거부는 당연하게 강요되어 오던 모든 전쟁의 동원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나는 이 사회 곳곳에서 각기 다른 얼굴로 위협하는 권력과 폭력에 문제 제기할 것입니다. 논의의 당사자성마저 지워버린 권력에 저항할 것입니다. 나에게 ‘병역거부’는 1980년 5월을 살았던 8살 아이의 질문을 마주하는 일이고, 제주라는 정치문화의 지형에서 드디어 깨닫게 된 인류로서의 실천입니다.

• 나는 사람들이 거대한 기만에 희생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 여성이 병역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가 내가 여성으로서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 나는 폭력에 가담했고 동원됐던 사람으로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해 병역을 거부합니다.
• 나에게 병역거부는 평화롭게 살 권리이자 세계시민으로서의 책무입니다.
• 나는 모든 폭력에 단호히 맞설 것입니다.
• 전쟁에서 많은 희생을 내서라도 승리하는 것이 평화라는 생각과 계속 만날 것입니다. 그것을 주창하는 권력의 착각과 기만을 말하겠습니다.
• 이 모든 결정은 이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겠습니다. 당연히 병역을 거부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나를 병역거부 선언으로 내몬 글 하나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 경제가 살아났습니다. 대한민국의 부름에 주저 없이 응답했습니다. 폭염과 정글 속에서 역경을 딛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 2017년 6월 6일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중에서
- 2019년 5월 14일 강정에서 온 멸치, 엄문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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