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숙 칼럼](7)대림리 밭담 길에서 밑줄 그은 문장으로
[양민숙 칼럼](7)대림리 밭담 길에서 밑줄 그은 문장으로
  • 뉴스N제주
  • 승인 2019.03.2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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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길, 위로하는 문학 7
시인 양민숙
양민숙 시인
양민숙 시인

오로지 책을 읽어야 되는 시간이 있다. 중요한 일을 시작하기 전 집중을 필요로 할 때는 습관처럼 책을 꺼낸다. 책의 어느 페이지를 열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여러 갈래로 나뉘었던 생각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면 일에 소모되는 시간을 훨씬 줄일 수 있고 결과와 만족도도 높다. 그러니 책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남들이 이야기하는 수백 가지의 중요성 말고도 나만의 집중력 특효약으로 자리하고 있다.

물론 가끔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우연히 편 페이지에서 스르륵 들어오는 문장에 빠져 일은 잊고 철퍼덕 주저앉아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꼼짝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커피에 의존하며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몸도 마음도 바빠진다.

나의 책 읽기는 이처럼 작정하고 읽기 보다는 우연히 코드 맞음으로 해서 이어질 때가 많다. 그렇게 하나씩 필연이 되어간다.

일도 그렇다. 어떤 일을 해보기 전부터 내게 딱 맞을 것 같은 일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사람도 그렇다. 첫눈에 나랑 잘 맞을 것 같아 라는 예감은 그리 들어맞지 않는다. 직접 경험해보고 만나보고 이야기 나누고 많은 상황을 거쳐봐야 나와 맞는 책, 나와 맞는 일, 나와 맞는 사람이 가려질 수 있다. 그러기에 그 과정 안에서 거듭되는 실패는 어쩌면 스스로를 더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윤활유가 될 수도 있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그렇게 어느 날 읽었던 시집 속에서 발견한 한 편의 시는 조심조심 다가와 많은 생각을 주었다. 작품에 등장했던 풍경에 서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온통 나조차도 풍경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의 상처였을 모습 안으로 굳이 들어가려고 함은 시가 주는 시각적 문장 때문이다. 문장을 통해 감각적으로 다가왔던 모습이 나의 또 다른 길 여행이 되었다.

사랑은 덜 핀 꽃, 애써 가슴 눌렀으나
수확을 포기한 자갈밭의 브로콜리
아, 봄볕 어쩌지 못해 꽃눈 풀어 헤친다
갈아엎지 못하는 촌부의 새벽으로
맥 풀린 경운기의 크렁크렁 기침 소리
노랗게 지평에 뜨는 상처 모두 꽃이다
           -김진숙 시인 '상처가 다 꽃이다' 전문

이 길을 알고 있었다.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곧은길보다 구불거리는 길에 들어서기를 망설이지 않는지라 어느 길이든 들어서고 보는 것이 습관이 된 때였다. 길에 들어서는 풍경부터가 남달랐다. 일반적인 제주 밭담 길은 선 자리에서 바라보이는 곳까지의 한계가 그리 넓지 않다. 지평이 일정하기에 선길과 보이는 길 끝자리가 그리 길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은 초입에서 보이는 길 끝자리가 너무도 광활하게 퍼져 있었다. 멀리 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들어가는 부분보다 이어지는 길이 점점 지대가 낮음 이유에서였다.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걷다보니 지대만큼 조금씩 낮아지는 나를 볼 수 있었다.

그때 하나의 풍경을 목격했다. 밭 전체 노란 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엔 유채꽃인가 싶었는데 유채꽃이 피기엔 이른 시기였다. 자세히 보니 브로콜리 수확을 마친 밭에서 올라온 브로콜리 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확을 포기한 브로콜리에서 올라온 꽃이었다. 무리지어 핀 브로콜리 꽃은 유채꽃만큼이나 노랗고 이른 봄바람에 흔들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좀 더 꽃잎이 컸다. 뭔가 유채꽃하고는 다른 슬픔이 느껴졌다.

농촌에 살며 농사를 짓고 있는지라 파종부터 수확까지 농부들의 수고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모든 작물이든 다 적정 수확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브로콜리만큼 수확기에 예민한 작물도 없다. 가격이 맞지 않아 수확을 포기하거나, 봄볕에 한꺼번에 피어버려 수확시기를 놓치거나 아린 농부마음은 아랑곳 않고 밭 가득 노랗게 꽃으로 피어 시선을 붙잡는다.

농부들은 이 모습을 오래 놔두지 않는다. 자칫 게으른 농부소리 들을까, 혹은 올해 농사가 안 되었다는 소리를 들을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얼른 밭을 갈아엎고, 상처를 술로 꾹꾹 누른다.

살아가는 것이 다 그런 것이라는 어느 시대 어느 누가 말했을 명언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을 마감하고 내일을 그린다.

오로지 길을 떠나야 되는 시간이 있다. 하나의 문장이 가슴에 와락 다가왔을 때 그 문장의 일부분이 되고 싶은 충동이 인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길을 나선다. 그리고 문장이 만들어 준 현장에서 밑줄을 그으며 오늘을 살아간다. 오늘 만난 이 길에서, 이 詩에서 타인의 기억과 타인의 삶을 불러온다.

▶ 찾아가는 길 :

출발, 한림읍 대림리 3-2번지, 500m정도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올레길 15-A코스와 만난다. 그 길을 따라 왼쪽으로 큰 길까지 간다. 도착, 한림읍 일주서로 5584-1. 총 1.5km정도의 길이며 도보로 30분 정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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