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33)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혜화역 4번 출구
[김필영 시문학 칼럼](33)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혜화역 4번 출구
  • 뉴스N제주
  • 승인 2023.02.25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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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정호승 시집, 여행,46쪽 : 창비시

(이상국 시집, 뿔을 적시며 : 창비시선 342) 80쪽, 혜화역 4번 출구. 감상평 : 김필영(시인)

혜화역 4번 출구

이상국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것을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출구 앞에서
그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가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집, 사라져가는 서글픈 둥지』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 마을 어귀에 이르렀을 때,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을 보면 발걸음이 빨라진다. 사람이 집을 떠나 낯선 대상을 만나고 뜻하지 않게 겪어야 했던 일들과의 서먹함에서 편안한 공간인‘집’으로 돌아옴은 둥지를 찾아드는 새들의 회귀본능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인구증가와 산업문명의 발달은 대가족제도의 고유한 거처인‘집’에 대한 개념을 바꿔놓았다. 우리의 집은 어디이고, 그 집엔 누가 있는가? 이상국 시인의 시를 통해 우리들의 집의 현주소를 들여다본다.

시의 제목‘혜화역 4번 출구’는 서울 노원구 당고개역에서 서울역을 경유해 시흥시 오이도역을 향하는 수도권 전철4호선 혜화역의 출입구중 하나이다. 시의 제목과는 달리 첫 연은, 시골에서 사는 나이든 아버지가 서울의 대학에 다니는 딸을 찾아와 비좁은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풍경이 산문체로 묘사되고 있다.

방의 주인인 딸은 모처럼 상경해 바닥에서 자는 아버지께 잠자리를 바꾸자고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어림없다.“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라는 행간에 딸을 길러오는 동안 겪었을 숱한 일화들이 함축되어있다.

화자가 등을 뉘던 고향“집”의 황토방이 아닌, 도시의 차가운 시멘트방바닥이 편할 리 없으련만“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딸에 대한 이 땅의 아버지의 속사랑이 전해온다.

2연엔 아버지와 딸의 시대적 존재상황의 엇갈림이 묘사된다. 시멘트 바닥에 잠자리를 편 아버지는 학업에 지친 딸이 쉬도록 자는 척 했을 테지만 잠이 올 리 없다. 정겹고 그리운 이들, 사랑하는 가족이 사는“집”에서 딸과 함께 살 수 없을 것 같은 예감과 딸이 살아가야할 불안정한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안타까워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는 말은 편치 않은 마음을 감춘 넋두리다. 수백 년이나 소를 기르고 살아온 조상의 후손으로“대지의 소작”인 자신과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것을”배우는 딸의 극명하게 엇갈리는 시대적 상황은 더는‘집’이라는 둥지에 딸과 함께 돌아갈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묘사에서 마치 외동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논바닥처럼 갈라진 마음이 전해온다.

3,4연은 딸과 여러 번 작별하고‘집’으로 돌아온 후의 풍경인 듯하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라며 아쉬워하면서도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딸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올 때,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능청을 부리는 묘사는 딸을 보내려는 마음을 정리해가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제 화자는 우리를“혜화역 4번출구 앞”으로 이끈다.“마지막 농사”처럼 귀한 딸을 세상이라는 황량한 곳에 남겨두고 자기만“집”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아버지는 딸 앞에서 차마 울 수 없다. 아버지를 꼭 안아주며 귓전에 들려준 “아빠 잘가”라는 딸애의 작별인사를 눈물 감추듯 행갈이 하지 못하고 마지막 행간에 살며시 감추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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